법주사 여승을 자결에 이르도록 하다, 박중양

2014.04.15 17:02:10

조혁연대기자

일본식 이름이 호추시게요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일제강점 기간인 1920년대 충북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산수유람 편의를 위해 속리산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을 지시한 것은 1923년 6월 중순이었다.

말티고개는 그로부터 1개월후 오솔길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박중양이 1년 후인 1924년 11월 초순 속리산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그는 그 이전에 화양동 등 괴산지역 명승지를 1주일간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올 정도로 유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이 장기 유람을 관행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박중양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박중양의 이날 법주사 방문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일부 공무원, 그리고 신문기자 등이 동행했다.

사이토 마사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1927년 동안 제 3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 스타일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고, 이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다. 일행은 젊고 예쁜 비구니(여승)를 불러앉힌 후 밤늦도록 주연을 가졌다.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경 속리사에 도착하여가지고 그날밤 마침 달밝음을 기회로 하여 큰 법당을 치워놓고 주연을 여는 동시에 2백여 명의 여승 중에서 가장 젊고 여어쁜 여승 여섯 사람을 뽑아서 잔질을 시키어가면서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동아일보 1925년 3월 6일자>

생전의 박중양 모습.

문제는 그 후에 불거졌다. 박중양은 마사토 총독이 자리를 뜨자 자리를 고치고 수행원, 신문기자 등과 함께 술자리를 계속했다. 그는 이때 방구석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승 양순재를 발견, 그녀를 끌어다 옆에 앉혔다.

'박지사는 취기가 점점 더하여감을 따라, 놀란 양과도 같이 아무 소리 없이 한 구석에 꿇어앉아 있는 여승 양순재(20)의 고운 얼굴에 자주 날카로운 추파를 보내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옆으로 같이 끌어다가 앉히고…'-<〃>

이날짜 <동아일보>는 후속 기사를 '부드러운 손목을 힘있게 움켜잡고 앉았다가 새벽 네시경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은 모두 피곤과 취기를 못이겨 모로가로 쓰러져버린 틈을 타서 박지사는 양순재의 손목을 잡은 채로 일어서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라고 적었다.

박중양이 다음날 아침 법주사를 떠나려하자 여승들이 나와 그를 배웅했다. 그러나 여승 양순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로부터 4-5일 후 승방 후미진 구석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녀는 능욕의 분노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

이 내용은 당시에 바로 보도되지 않고 그로부터 4개월 정도 지나 <동아일보>가 1925년 3월 6일자로 기사화했다. 기사를 작성한 <동아일보> 기자가 당시 현장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워낙 상대가 거물이라 4개월 동안 갈등을 하다가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론이 들끓자 박중양은 결국 3월 31일자로 충북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보도를 한 <동아일보>는 '자태의 어여쁨이 원수가 되어가지고 몸을 더럽히고 최후 사지를 밟기에 이른 양순재의 생애!'라고 그녀를 추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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