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영원으로

2014.06.30 14:01:07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얼마 전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던 아내가 탄식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열권에 가까운 가족 앨범이 창고의 습기 때문에 일부 사진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것이었다. 앨범에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간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들이 주로 담겨 있었다. 부피가 큰 앨범을 책꽂이에 보관하기 어려워 몇 년 전 전집류의 책들과 함께 창고에 넣어 두었던 것인데, 그만 통탄할 일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의 사진들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내는 무척이나 상심했다. 배경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었더라도 다행히 아이들 얼굴만이라도 남은 사진들을 아내는 정성껏 오려 새로운 앨범에 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아내의 시간여행은 시작되었다.

집안 전체를 이 잡듯 뒤져내 버리지 않은 옛 필름들을 찾아냈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다시금 생기와 화색이 돌았다. 자신이 보관을 잘못해 아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에 휩싸여 있던 차였다. 이제는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코닥'이나 '후지' 필름들을 사진관에 맡겼더니 고맙고 신기하게도 그 필름들은 기어 다니거나, 보행기를 타고 있거나, 할머니 품에 안겨 환히 웃고 있는 아가들의 얼굴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러고 보면 필름이 좋긴 한 것 같아요. 요즘은 디카나 스마트폰으로 촬영해서 모니터에서만 몇 번 보다 사진들이 그냥 사라져요. 클릭 한 번에 그냥 날아가는 경우도 많구요"

사진관 주인의 말이었다. 필름 현상이 사라져서 수익이 줄어든 서운함도 있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보면 필름이 사라지고부터는 앨범에 담기는 사진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아내가 앨범을 창고에서 꺼내보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손자들 사진을 갖다달라고 부탁을 하면서였다. 노쇠해지셔서 외출도 불편해지시니 집안 곳곳에 손자들 사진이라도 놓고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큰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웅진출판사에서 주관한 독후감대회 시상식에 참석했던 가족사진을 크게 현상하여 액자에 담아 갖다 드렸다. 필름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들 얼굴을 들여다보시며 즐거워하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부모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릴, 사진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가진 매체를 생각했다. 바로 5년 이상 고장이 난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캠코더였다. 아이들의 출생부터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 촬영된 테이프가 열 개 남짓 있었다. 캠코더회사의 서비스센터가 청주에는 없어서 아내는 대전까지 캠코더와 촬영했던 테이프를 들고 직접 갔다. 서비스센터에서는 택배로 보내라고 했지만 아내는 직접 오가기를 고집했다. 요즘 세상에 분실되는 택배가 어디 있냐며 만류했으나 아내는 고집을 꺾지 않고 몇 번을 직접 오가며 테이프를 DVD로 변환했다. DVD에 담긴 내용은 평범한 일상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청년이 다 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기 때 모습, 유치원 재롱잔치, 젊었던 우리 부부의 모습, 손자를 어르는 부모님의 영상 등이 생생한 육성과 어우러져 우리 가족만의 영화이자 다큐로 손색이 없었다.

요즘 부모님은 며칠 째 어린 손자들의 웃음과 재롱에 푹 빠져 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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