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 명화적 칼에 희생…숙종도 큰 관심

2014.08.07 15:18:05

조혁연 대기자

증평 율리 삼거리에서 좌구산 방향으로 달리면 삼기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서 더 진행하면 율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이 마을 뒷산에 백곡 김득신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증평군청 자료는 백곡의 묘에 대해 '김치(김득신 부친)의 상여가 좌구산과 구녀산 사이로 난 분젓치(옛 영남통로)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상여의 만장이 날아가서 이곳에 앉는지라 명당이라고 생각한 후손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구전을 옮겨 놓았다.

김득신 묘역 모습

김득신 묘의 봉분은 높이 1.6m이고 묘지둘레는 20m로,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석, 동자석이 놓여있다. 김득신 묘 바로 위에는 조선 중기 최고의 주역 연구가이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김치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김씨 부자는 한남금북정맥 최고봉인 좌구산 산록에서 나란히 영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김득신은 17세기 인물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생몰연대가 '1604∼1684년'이니까, 약 80년 동안 생존했다. 이와 관련, 증평군지는 백곡에 대한 설명문 말미를 '저서로 백곡집(栢谷集)·종남총지(終南叢誌)가 있다. 유학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했다.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라고 의외로 간략히 적었다.

김득신은 장수했지만 불행하게도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백곡의 마지막 길에 대한 내용은 의외로 조선왕조실록에 비교적 장문으로 실려 있다.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글을 읽었고, 늙어서 더욱 부지런하였으나, 사람됨이 오활하여 시대에 쓰인 바 없었다. 충청도 괴산(槐山) 땅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살해되었다.' -<숙종실록 10년 9월 6일자>

또 다른 기록인 묘지명을 보면, 김득신은 살해당하기 직전 노환으로 인해 몸져누워 있었다. 그런 무방비 상태에서 명화적이 휘두른 칼에 희생됐다. 명화적(明火賊)은 밤중에 횃불을 들고 떼지어 다니며 민가를 습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달리 '명화강도(明火强盜)'나 '화적(火賊)'이라고도 불렀다.

김득신은 너무 늦은 나이인 59세에 문과에 합격했기 때문에 큰 벼슬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사대부가 명화적에 살해당한 것은 그 당시에도 커다란 사건이 됐다.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즉각 이를 조정에 보고했고, 그러자 숙종은 범인을 조속히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명화적이 사부(士夫)의 집에 들어가서 인명을 살해하여 2품 재신(宰臣)이 칼날에 상하여 죽었으니, 놀라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각진(各鎭)의 토포사(討捕使)로 하여금 시일을 한정하여 찾아 잡게 하라."

인용문의 토포사는 도적(산적·화적 등)을 수색·체포하기 위해 임명한 특임 관직으로 대개 각지방 수령이나 진영장(鎭營將)이 겸임했다. 1561년(명종 16) 임꺽정(林巨正)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하여 남치근(南致勤)이 임시로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이 첫 사례이다.

이후 숙종은 김득신 장례에 제수품을 내리는 등 이 사건에 끝까지 관심을 표했다. 같은 날짜 숙종실록에는 '해조(該曹)에 명하여 상수(喪需)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김득신 부자 묘역은 올 도기념물 제 16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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