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2016.10.11 18:17:59

박선예

수필가

언제 더위가 갈까 싶었는데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맑은 하늘은 금방이라도 쪽물을 쏟아낼 듯 푸르고, 민들레 홀씨들은 새 삶을 찾아 진작 여행을 떠났다, 열매를 다 털린 대추나무는 몇 남지 않은 잎사귀로 앙상한 가지를 숨기느라 여념이 없고. 산자락에 머물던 가을색은 중턱까지 오르내리며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아, 그래 어느새 가을이구나. 그래서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졌구나. 잠자고 또 잠을 자도 몽롱하고 심장에 바람이 들락거리며 나를 괴롭혔구나. 신나는 음악에도 눈물이 나고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서글픔에 자꾸만 가슴이 미어졌구나.

이 가을, 나는 또 얼마나 시달리고 애를 써야 이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버렸는데 모두 버렸는데. 아닌가보다. 내안에서는 아직도 욕심과 미움이 자라나고 있나보다.

아, 차라리 가을이고 싶다.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선홍색 단풍잎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싶다. 까치밥으로 남아 청자 빛 하늘을 하염없이 우러르고 싶고, 멍석 위의 나락이 되어 가을볕의 간지러움도 느껴보고 싶다. 진노랑 국화로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싶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물고기의 감촉을 만끽하고프다. 고추잠자리가 되어 개구쟁이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싶고 봉숭아 꽃씨처럼 내안의 감성을 펑펑 터트리고 싶으며, 깊고 깊은 강물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보고 싶고, 파도가 되어 거친 바다를 맘껏 희롱하고 싶다.

그냥 가을이면 좋겠다. 고개 숙인 이삭도 좋고 벌거숭이 허수아비라도 좋다. 지조 없이 흔들리는 갈대도 괜찮고 다람쥐의 먹이가 될 도토리도 좋다. 이름 없는 잡초라도 상관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들꽃이라도 감지덕지하다. 그저 가을의 한부분이고 싶다.

가을빛이 청명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이때다 싶은지 앞산이 유혹하고 있다. 손만 내밀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이 내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눈 한번 껌벅이면 금방 제자리로 도망칠 거면서. 구름역시 지척에서 나를 시험하고 있다. 어서 팔을 뻗쳐 나를 만져봐. 얼마나 부드러운지. 얼마나 포근한지 하면서. 내가 손만 뻗치면 분명 정색하고 달아날 거면서.

세상이 투명하다. 강인가 했더니 하늘이고 하늘인가 했더니 강물이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강물을 스쳐 하늘로 오르더니 이내 곤두박질을 쳐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어느 게 강이고 하늘인지 분간이 안 되나보다. 하긴 하늘을 날며 짝짓기에 열중인 잠자리 떼들도 마치 물속에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는 모양새로도 보이니, 오리들의 착각쯤은 이해할만하다. 이 모두가 가을 때문이다.

한줄기 바람이 불자 갈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소리에 먹이를 쪼아 먹던 참새들이 화들짝 날아오르고 억새들이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편다. 강물위로 산 그림자 하늘거리고, 두둥실 뭉게구름이 숨바꼭질하듯 산 그림자 사이로 스며든다. 암팡스럽게 가을을 품고 있던 밤송이들은 여기저기에 툭툭 가을을 뱉어 내고 있다. 정신없이 주워 담았더니 어느새 주머니 가득 가을로 충만하다.

산을 등지고 들녘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무너져 내리는 가을 들녘은 빛이 났다. 힘이 넘쳤다. 가을이 익어가는 황금빛 들판은 석양빛이 더해져 참으로 장관이다. 아, 풍요롭다! 정말 아름답다! 어느 사이에 불치였던 가을 병도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그 병이 빌붙을 틈을 찾지 못한 탓이리라. 아, 가을은 내게 병도 되고 약도 되는 마법의 계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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