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다움에 대하여

2016.10.13 18:13:00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진정한 삶은 겪는 것이다. 기쁜 일도 겪고 슬픈 일도 겪고 아픔과 고난과 사랑도 겪고 또 겪는 것이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치열했다는 것이고 새 살 돋는 성장통을 견뎌냈다는 것이며 또 다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삶은 내 안에 들꽃의 향기, 소나무의 향기가 끼쳐오는 것이다.

도시의 삶은 고단하고 눅눅하다. 하루하루가 삶의 최전선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치열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만들어 가며 새로운 삶을 허락한다. 인간이 위대한 것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삶의 마디와 존재의 가치를 차곡 차곡 쌓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낡은 공간에 들어서면 인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사람들의 삶과 사랑과 아픔이 그대로 얼룩져 있기에 정감이 넘친다.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진다. 낡은 공간에 꽃피는 도시의 미학,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며 삶의 여백을 찾게 된다. 지구촌이 도시재생이라는 화두에 몰입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 대농공장에 마지막 남은 건물인 대농교회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동산위에 상당산성 남문의 이미지를 담은 교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리석으로 건축미를 뽐내는 외형과 달리 내부는 조용하고 단정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며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다가 몸도 마음도 지쳐 의지할 곳 없을 때, 그들은 이곳에 무릎 끓고 자신을 성찰하며 새로운 도약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철거라니.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과 대농의 역사를 엿볼 수 있도록 보존하자고 했으나 결국은 헐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낮선 도시를 갈 때는 어김없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도시의 속살은 뒷골목의 낡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동경과 파리와 런던의 거대 도시 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에도 사람들의 애달픈 사연은 어김없이 낡고 허름한 곳에 서려 있다. 사람들은 그 곳을 함부로 헐거나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문화공동체로, 예술의 성지로, 창조의 보물창고로 가꾸며 발전시키고 있었다.

2011년 9월에 옛 청주연초제조창에서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이 낡고 더러운 곳에서 국제행사를 한다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누구는 청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다며 삿대질까지 했다. 코끝을 맹맹하게 하는 담배냄새와 켜켜이 쌓여있는 비둘기들의 잔해물, 무성한 잡풀과 버짐처럼 벗겨져 나간 건물의 외벽을 보면서 등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나는 담배공장 한 가운데서 물똥을 쌌다. 그럼에도 돌아설 수 없었던 것은 거칠고 야성적이며 흉물스러운 그 곳에 옛 사람들의 진한 땀방울이 있었고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으며 시대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퇴근길에는 언제나 큰 도로가 아닌 골목길을 선택한다. 분평동에서 출발해 무심천을 지나 일신여고와 서운동과 충북도청 뒷길로 향한다. 우암산길을 따라 담배공장까지 가는 20여 분은 가슴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그 길 주변에는 낮고 느림의 미학이 숨어있다. 골목마다 까치발을 하면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근대문화유산의 보고(寶庫)임에도 보존과 활용에 대한 논리나 대응은 미약하다.

나는 이따금 '청주다움'을 생각한다. 무엇이 청주다움일까. 청주만의 멋과 맛과 향과 결이 살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시작은 우리 주변의 공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 지나온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이것들을 체계적이고 창의적인 콘텐츠로 특화시키려는 노력일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풍요와 쓸쓸함의 경계에서 도시풍경을 밟으며 산책을 한다. 도시에 대한 시선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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