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것의 정서

2017.01.19 15:22:51

최현정

다큐멘터리 작가

'오래된'이라는 단어에는 시간이 묻어있다. 또한 과거적 물성이 담긴 탓에 이미 지나가버린 것, 낡고 닳아 먼지마저 더께더께 앉아버린 것이 무릇 '오래된'이 가진 인상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렸겠지만 거기에는 다소 부정의 느낌도 들어 있다. 하지만 단어의 조합이 그러하듯 어떤 말과 함께 이어졌을 때 묘한 유레카(Eureka,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단어)를 불러일으킨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래된 미래'다. 이는 스웨덴 언어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를 방문하고 쓴 책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Ancient Futures : Learning from Ladakh)》에서 비롯된 단어다. 오랜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라다크라는 마을이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점차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본 저자는 회복을 위한 방법을 라다크의 오래된 삶에서 찾아내고 지속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조근조근 짚어주었다.

이후로 '오래된 미래'란 단어는 마치 유행처럼 번져서 각종 책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필자가 참여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에도 '오래된 미래', '오래된 약속' 등이 등장한다. 무릇 좋은 것은 두고두고 실용하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방송작가로서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생산해 오고 있지만, 가장 신나는 일이 '옛 것을 돌이켜보기'다. 나이테처럼 겹겹이 남아있는 삶의 지문, 온통 시간이 묵고 익어 이루어진 오래된 것은 들여다볼수록 깊고 진한 여운이 있다. 우리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지만 그것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묵은 책, 오간 편지글, 옛 집, 삶의 도구 등은 웬만한 드라마보다 재미있다. 그래서 사전취재에는 꼭 혼자서만 그 옛길을 밟고 몰래 되새김하는 나만의 습관을 지녔다. 잊히고 낡았지만 그것에 묵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마치 보물찾기하는 심정이랄까.

외국인의 한국생활 체험이라는 주제로 취재를 했던 경상북도 고령군의 개실마을이란 곳이 있다. 조선전기 문신 김종직의 후손인 일선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전통마을. 마을 안쪽의 종택을 중심으로 한 집 한 집 들어서면서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은 유난히 담장이 낮다. 어르신들 조금만 뒷 꿈치를 들어도 그 집 안마당이, 살림살이가 훤히 드러난다. 그리고 담을 사이에 두고 오늘 찬거리가 뭔지 농사일이 어찌되었는지 두런두런 일상을 나눈다. 단절과 외면의 담이 소통과 연결의 도구가 된 것이다. 옛 마을의 그 정겨운 장면은 높이 솟은 회색빛 도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정서다.

요즘 TV 드라마 속에서는 타임슬립이 온통 도구로 쓰인다. 시간을 넘나들어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주고, 과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주인공의 모험이 전대되어 극적 긴장감을 더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시간이란, 그렇게 과거란, 온통 후회투성이기만 한 것일까? 더불어 내가 걸어온 삶, 인류가 만들어낸 이 시간적 축적이 죄다 쓸모없고 헛되기만 한 것일까?

아는 것만큼 보이고, 들여다볼수록 알아진다. 우리네 옛님의 삶들, 그들을 둘러싼 것들이 시간을 두고 남겨온 것에는 신기하게도 오늘을 돌이켜보고 내일을 가늠하게 하는 힘이 있다. 불가능한 기적만 바라며 내 현실을 탓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잠시 오래된 것들을 들여다보며 그곳에 깃든 마음과 추억, 그리고 쓸모를 되새겨 보자. 분명히 우리의 삶이, 꽤 괜찮은 '오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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