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원의 상처

2017.01.23 14:01:12

변혜정

충북 여성정책관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필자 학교는 시험 성적에 근거하여 매월 상을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필자는 계속해서 상을 받지 못했다. 반장으로 활동하며 나름 시험도 잘 본 것 같은데 선생님이 불러주는 시험 점수는 그렇지 않았다. 예상한 점수와 항상 차이가 컸다. 필자는 내심 속상했고 억울했다.

계속 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고심했던 11세 소녀는, 학교를 찾아 가지 않은 엄마가 그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학부모방문과 촌지의 관계는 몰랐지만 계속 상을 받는 친구 엄마들이 학교를 자주 방문한다는 것은 알았다. 매일 엄마를 졸랐다. 차일피일 학교방문을 미룬 엄마는 어느 날 학교를 찾아 갔고 필자는 우수상을 받았다. 그 이후 엄마는 매월 학교를 갔고 필자도 매월 우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우연히 엄마 핸드백에 들어 있던 선생님 이름이 쓰여 진 '2000원 봉투'가 우수상과 관련 있다는 것을 필자는 알아 버렸다. 그 이후 성적 우수상이라 할지라도 항상 찜찜했다. 필자에게 상은 더 이상 '상'이 아니었다. 학교를 불신하고 사회를 못 믿는 '의심병'(?)이 생긴 것도 그 때가 아닌가 싶다. 1974년은 중동오일쇼크로 학교를 찾을 수 있는 집안 형편이 아니었다는 후일 엄마의 해명으로 모든 것은 더 명확해졌다.

오랫동안 촌지 관행은 없어지지 않았다. 학부모가 된 필자는 더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름의 소신으로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주지 않았으나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학기말에 문화 상품권이나 편지로 감사마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아이를 맡긴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항상 골치가 아팠다.

작년에 이러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생겼다. 바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다. '선생님에게는 캔커피도 안된다'는 조항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초기에는 더더욱 엄격한 잣대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요즘 '법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피해실태조사를 점검하면서 구체적인 개정방안을 협의 하겠다'는 언론 기사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음식물 접대·선물·경조사비 상한선 조항이 지나치게 엄격해 내수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에 품목과 가액기준을 조정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 청탁금지법과 내수위축을 연관시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내수위축이나 농·축산 관련자들의 생존도 걱정해야 한다. 단 이 법과 연관시키지는 말자. 경기활성화를 위해 품목이나 가액기준 조정 등은 잘못하면 법 자체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 과거 경기활성화가 농·축산품 선물 덕분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그랬다면 이는 총체적인 사회 문제이다.

감사의 마음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김영란법'은 선물 등의 '주는 것'에 관한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자 예의이다. 원래 선물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그 순간의 감사 마음의 표현이다. 만약 이러한 약속이 내면화되면 선물을 주는 사람은 물론 받는 사람도 '선물 하지 않는 자'를 괘씸하게 여겨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걱정한다. '상상할 수 없는 대가'가 오가는 정치 경제 현장에서의 뇌물에 비해 사소하게 보이는, 3·5·10 상한선 기준 조정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더 큰 도둑을 잡는 중요한 문제를 놓칠 수 있단다. 그럼에도 일상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할 때 더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곧 민족 대 명절 구정이다. 작은 선물을 통해 그간의 감사를 표현해보자. '김영란법'이 선물 주고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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