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서도 상처…새시대 위한 산통(産痛)

영국 교민·유학생들이 본 '국정농단'
노력한 사람 아닌 권력 가까운 사람이 보상 받는게 문제
'최순실 사태' 해결점 없는 청문회 답답

2017.01.25 21:29:33

영국 런던의 관광명소인 피카딜리서커스의 풍경.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이 곳 거리에서 중심에 우뚝 선 LG의 홍보전광판은 한국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

ⓒ신은서 TV조선 기자
[충북일보] "당신도 당신 대통령처럼 불어를 잘할 수 있나요?"

2013년 11월 프랑스. 수행기자단까지 주최측의 기대섞인 질문을 받을 정도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불어 연설은 화제였다. 이어진 영국 국빈방문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대화하던 박 대통령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3년 만인 2016년 11월. 영국 전역의 한인 박사·연구자 87명은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그 중심에는 영국의 사회과학대학 런던 정경대(LSE)가 있었다.

장영욱 LSE 박사(경제사)는 "경제는 좋은 제도를 통해 성장하는데 비선실세 사태는 우리 제도의 후진성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노력한 사람이 아니라 권력과 가까운 사람이 보상받는 게 문제입니다. 기업의 사유재산권이 침해됐을 뿐 아니라 그 주체가 절차적 정당성도 없는 비전문가였죠."

LSE 석사중인 신미주(비교정치)씨도 "미르재단이 몇 일만에 수백억 원을 모아 충격"이었다며 "정부가 이런 데만 신속하다"고 꼬집었다. 신 양은 불투명한 정치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은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바로 대답하고 의원들과도 정기적으로 토론해요. 우리는 이런 시스템이 안 돼 있어서 대통령이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 싶으면 (소통)하지 않는 거죠."

런던 정경대(LSE) 캠퍼스에 모인 유학생들. 학생들은 고국의 상황을 크게 걱정하면서 바람직한 사회변화상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쏟아냈다. 왼쪽부터 장영욱, 조은정, 양정우씨.

ⓒ신은서 TV조선 기자
학부생들도 이번 사태에는 관심이 남달랐다.

영국시민인 양정우(경제)씨는 해결점 없이 계속되는 청문회가 특히 답답하다고 말한다. "브렉시트 투표 후 바로 캐머런 전 총리가 내려오고 혼란이 수습됐죠. 영국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끌지 않고 정치인 스스로 나서 상황이 종료됐을 것입니다."

조은정(철학·경제)씨는 언론에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외국인들이 최순실 샤머니즘을 물어보는데 언론에서 본 얘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 언론도 물고 늘어지다 못해 선을 넘은 것 같았어요."

교민들의 반응은 더 복잡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앞두고 영국 뉴몰든의 한 카페에 한국인 4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크게 우려하면서 각각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우옥경, 조현자, 오택희, 조영옥씨.

ⓒ신은서 TV조선 기자
이민 1.5세대인 조영옥씨(건축기술사)는 현지 방송으로 한국뉴스를 보면서 세월호 참사 당시 안타까움을 떠올렸다. "세월호는 영국 사람들도 잘 알아요. 여기는 사다리 하나 사용하는 것부터 안전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창피했죠."

충남 출신인 우옥경(유미회관 사장)씨는 가뜩이나 움츠러든 교민사회가 타격을 입을까 우려했다. "회장들이 청문회 나오는데 누가 회식을 하겠어요. 여기서 모임도 없어졌어요." 우 씨를 비롯한 이민 1세대들은 박 대통령에 대한 측은함과 배신감이 동시에 묻어나왔다.

하지만 자녀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달라졌다. 다음달 딸과 함께 한국 찾을 계획인 오택희(우정 사장) 씨는 촛불집회에 대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시위"라고 가르쳐줄 예정이다. "다음 대통령은 법조계 개혁, 양극화 해소를 꼭 좀 이뤄줬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자(영국한인회장) 씨도 "이번일이 법을 잘 지키게 되는 전화위복이 될 수 도 있다"며 "전경련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한류는 빠른 속도로 영국에 파고들었다. 런던의 관광 명소 피카딜리서커스의 대형 광고판은 국내 대기업이 장악한 지 오래다.

"식당에도 한국말을 배우고 오기 때문에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돼요(우옥경)". "한국도 많이 바뀌었어요. 문화 행사도 많아지고. 사람들이 개성이 없어졌지만(조현자)."

교민들은 새해엔 제도권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대사관에서 차세대 리더로 사업하는 사람도 키워줬으면 좋겠어요. 중국인들처럼요(오택희)." "BBC에서 신문 1면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한국의 개고기, 도살장 기사가 실렸습니다. 영국인은 한국하면 개를 먹는 나라란 편견이 있어 속상했습니다(조영옥)."

학생들의 바람은 예상외로 남북통일이었다.

영국 일간지 1면(2016년 12월)에 실린 한국의 개사육 농장. 교민과 유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오는 3월 LSE주최 북한 컨퍼런스를 준비중인 조은정 양은 "북한하면 핵과 인권만 인식하는 게 안타까워 행사를 기획했다"고 강조했다. 신미주 양은 개성공단 중단을 아쉬워했다. "김정은 체제에서 변화를 꾀해볼 수 있었는데 정부가 남북관계는 고민을 많이 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애국심에도 국내 취직은 여전히 무거운 주제였다.

"한국은 위에서 결정하면 밑으로 내려오는 시스템이죠. 수평관계에서 책임감을 갖고 일 할 수 있는 영국 문화가 저와 더 맞는 것 같습니다(양정우)."

그런가하면 영국의 박사들은 새해 첫 행사로 28일(현지) LSE에서 '국정농단 이후 한국사회' 세미나를 갖는다.

"평생 연구했는데 정치논리에 의해서 채택이 안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정치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장영욱)."

한글 이름이 어렵다는 영국 학생들도 한국 대기업 이름은 한 번에 정확하게 발음한다. 영국의 한인들은 고국이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한 시대가 어느새 끝자락까지 온 듯하다. 그렇다고 아쉬울 필요는 없다.

변화는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그 시대가 있었기에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은서 / LSE 사회정책 석사과정(TV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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