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1천년史' 압축 매장돼 있다

청주읍성터서 신라~고려 유물 대량 발굴
명문기와 출토…서원경治所 가능성 높여
축성 역사 규명할 '丙辰'명 성돌도 발견돼

2011.03.30 21:29:01

청주읍성터 지하에 청주 1천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신라하대~고려시대 유물층이 또 다시 존재, 각종 유물이 대량 발굴되고 있다.

특히 이들 유물 중에는 '大中', '城'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도 출토, 청주읍성터가 과거 서원경 치소였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재단법인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지난 28일부터 남문로 2가 15번지 일대의 청주 남궁타워 신축공사 부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지표층을 걷어낸 청주읍성터 지하에 통일신라~일제강점기의 복합 문화층 일부가 교란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주읍성터 지하에 청주 1천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층이 또 다시 존재, 각종 유물이 대량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하수구로 사용된 성돌.

30일 현재 이 문화층에서 △9세기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기와와 수막새 △일제 강점기 이전의 옛우물 △일제가 하수구 석재로 사용한 청주읍성 성돌 등 청주 1천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매장 유물이 대량으로 쏟아지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에는 '大中', '城'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일대가 서원경의 치소(治所·행정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685년(신문왕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三月 置西原小京 ),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을 쌓았다'(秋閏九月二十六日 築西原京城)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그 동안 서원경 치소에 대해서는 지금의 청주읍성터설,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등이 존재했으나 고고학적 뒷받침이 없어 어느 것도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해왔다.

사진은 성돌 아래의 층위에서 발견된 옛우물 모습.

옛우물은 성돌 아래의 층위에서 발견됐다. 따라서 늦어도 일제 강점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보다 정확한 것은 우물속 내용물을 분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주읍성 안에 13개의 우물이 있는데 겨울·여름에 마르지 않는다'(內有井十三 冬夏不渴)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표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된 청주읍성 성돌은 그 석렬이 옛 하수관과 연결되고 있어 '일제 하수구 석재 사용' 사실을 100년만에 정확히 입증하고 있다.

일제는 지난 1911년 '시구 개정사업' 명문하에 청주읍성 성벽을 해체, 여기서 나온 성돌을 하수구 석재로 사용한 바 있다.

청주읍성터 지하에서 나온 '丙辰'명 성돌 모습.

이와는 별개로 '丙辰四月日畢役' 금석문이 새겨진 성돌이 발견돼, 청주읍성의 축성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丙辰四月日畢役'은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으로, 이를 분석하면 청주읍성의 초축내지 개축 역사를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충북대 차용걸(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번 발굴로 청주읍성터 지하에 청주 1천년의 역사정보가 압축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며 "따라서 철저한 발굴과 함께 신중한 개발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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