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하나 끼니를 잇지 못했다, 충주 정호

2012.05.15 17:24:07

조혁연 대기자

송강 정철의 직손 중에 정호(鄭澔·1648∼1736)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을사환국으로 파직돼 문외 출송됐으나 말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장암사당'이 우리고장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화영산에 위치하고 있다. 장암사당이 창동리에 자리잡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충주지방 최초의 서원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된 팔봉서원으로 김세필, 이자, 이연경 등을 제향했다. 이때까지 팔봉서원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중앙정계에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은 대립은 향촌의 사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서원 건립을 통해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남인계 인물인 한치상(韓致相·?-?)은 팔봉서원을 자파의 서원으로 간주하고 1672년(현종 13) 사액을 상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수신이 추향됐다. 이로서 팔봉서원에 정치색이 입혀졌다.

앞서 1661년(현종 2)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운곡서원을 건립, 스승인 정구(鄭逑·1543-1620)을 모셨다. 정구는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로 부임 후 서당을 열어 충주의 유학들을 지도한 인물이다.

충주지역 노론계도 남인들의 움직임에 거의 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 송시열의 제자인 정호는 1689년(숙종 15) 고향 인근인 가금면 누암리에 누암서원을 건립, 송시열의 제사를 모혔다.

1702년(숙종 28)에는 충주지역 노론계 인물인 정세식(鄭世湜·?-?)이 누암서원에 대한 사액을 받았다. 이때 송시열 외에 숙종의 장인인 민정중(閔鼎重)도 추향됐다.

후대에 이르러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하와 건립자 정호도 누암서원에 추향됐다. 그러나 누암서원은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돼 향사 기능은 사라지고 건물만 존치됐다.

이에 1952년 장암의 후손들이 누암리에 있던 서원의 건물 일부를 옮겨와 지금의 자리인 가금면 창동리에 장암사당을 세우고 송시열, 민정중, 권상하, 정호 등 4위를 제향하고 있다.

장암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충주에 정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료에는 '1636년 병조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여흥민씨)를 모시고 충주의 밭이 딸린 집(노은면 수룡리)으로 돌아가 스스로 수확하는데 몰두했다'고 적혀 있다.

수룡리에서 멀지 않은 곳인 노은 보련산 수류동(무지치)에 아버지 경연(慶演·1605-1667)과 어머니 여흥민씨(1623-1678)가 묻혀 있다. 따라서 장암 집안은 선대로부터 충주 노은에 농장을 갖고 있었거나, 아니면 장암의 외가일 수 있다.

1736년(영조 12) 정호가 졸했다. 그러자 당시 사관이 이례적으로 그의 졸기를 실록에 썼다.

'정호는 문청공 정철의 후손인데, 문정공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는데, 언론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위가 삼사(三事)에 이르렀으나, 집에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 고장에 살면서 청신(淸愼)하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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