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 일제강점기 때 뚫린 고개일까

2012.05.22 18:17:14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 '이화령 구간 복원 기공식'이 현장에서 열렸다. 금년 10월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연장 46m, 폭 14m의 생태너널이 구축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일제에 의해 끊어졌던 우리 민족의 대동맥을 이어 민족정기와 얼을 되찾게 됐다"는 요지의 축사를 한 것으로 언론이 보도했다.

민족 정기를 거론할 때 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이른바 '일제의 만행'이다.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받았다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 △지명을 개명했다 등의 내용이 단골로 뒤따른다.

이화령에서의 일제 만행은 두번째 유형인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로 설명됐다. 일제의 만행은 상당부분 사실이고 문헌이나 행정기록 등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이화령을 신작로 형태로 개통시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화령이 한반도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가 아닌 고려시대다.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 만큼 고려시대에 작성됐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사는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대왕의명을 받아 기술했다.

고려사에 이화령(梨花嶺)의 또 다른 표현인 '이화현'(伊火峴)이 처음 등장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기술된 세종실록에도 거의 같은 표현의 이화현이 등장한다.

'험조처(險阻處)가 3이니, 하나는 초점(草岾)인데, 현 서쪽 19리에 있다. 충청도 충주의 지로(指路)인데, 험조처가 7리이다. 하나는 이화현(伊火峴)인데, 현 서쪽에 있다. 충청도 영풍의 지로인데, 험조처가 5리이다. 하나는 관갑천관갑천(串甲遷)인데, 현 남쪽 17리에 있다. 험조처가 4백30보이다. 소둔산록은 현 서쪽 13리에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조령(새재)을 통해 북진했다. 그러자 당시 조정이 조령 외에 백두대간의 다른 고개에 관방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여기에도 이화령이 등장한다.

'그 나머지 옆으로 뻗은 소로로서 요성(聊城)이나 이화현(伊火峴) 같은 곳에도 반드시 용장을 별도로 정하여 사전에 복병을 설치하여 적을 막을 계책을 분부해야 됩니다. 대개 지세가 험하고 좁으면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제압할 수 있으니…'-<선조실록>

당시 최고 의결기관인 비변사는 이화현의 관방 기능이 충분하다고 판단, 고개 아래에 '험조'와 '둔전'을 둘 것을 건의하기도 한다.

'이화현(伊火峴)과 요성(聊城) 및 양산(陽山) 길도 아직 남아 있으니 반드시 다시 토잔에다 험조(險阻)를 설치하고 신원(新院)의 들에다가 크게 둔전(屯田)을 열어 조령과 더불어 서로 보익의 형세가 되게 한 후에야 충주(忠州)의 문호가 굳건해질 것입니다.'-<선조실록>

'토잔'은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험처로 일명 '토끼벼리'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신원은 괴산 연풍의 신혜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가 1925년 이화령을 신작로 개념으로 확장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없던 고개를 새로 뚫은 것은 아니다. 이화령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유구한 고개다.

이화령의 순우리말 이름은 '이우릿재', '이유릿재'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고증은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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