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民의 환영을 택하다, 대동법과 김육

2012.07.19 16:41:49

조혁연 대기자

1639년(인조 17)에 제천지역 유림이 김식(金湜)·김권(金權)·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존재했던 봉강서원(鳳崗書院) 이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중건됐고, 1672년에 '봉강(鳳崗)'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제사와 함께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배향 인물중에 김육(金堉·1580∼1658)이 보인다. 김육은 충청도의 대동법을 논할 때 생략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하나 그것이 조선시대 나라 전반에 미친 영향은 이성계와 사대부 일군이 위화도 회군후 실시한 과전법에 버금갔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잡다한 공물을 백미로 통일, 단순화시킨 공물법을 말한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리고장에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인조실록>

실록은 다음 문장을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고 적어 인조도 김육의 주장에 찬성했음을 분명히 했다. 김육의 주장은 바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대신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김육은 백성들의 어려움이 어디서 시작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동법 관철에 정치적 생명을 걸었다. 김육은 효종 즉위년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또 다시 주장했다.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효종실록>

인용문 중 양호는 호서 즉 충청도와 호남을 지칭한다. 김육은 이 상소에서 별도 보고서의 일종은 별폭을 첨부, 다음과 같이 아뢴다.

'양호(兩湖) 지방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로 목면이 5천 4백 동(同)이고 쌀이 8만 5천 석이니, 수단이 좋은 사람에게 부쳐 규획하여 조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효종실록>

대동법의 수혜를 수치로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효종은 이에 대해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大小)가 어떠한가"라는 명문장의 물음을 한다.

워낙 명문이라 원문으로 옮기면 "大同之法行而大戶怨, 不行而小民怨, 則怨之大小如何"가 된다. 이때가 효종 즉위년, 즉 1649년이다. 충청도에서의 대동법은 2년후인 1651년 시행됐다. 효종은 '대호(大戶)의 원망보다 소민(小民)의 환영'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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