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 뒤에는 행동하는 지식인, 조헌

2012.08.09 17:37:55

조혁연 대기자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청구영언·해동가요>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출처 미상>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첫번째 시조는 눈에 익은 시조로, 저자는 중봉(또는 후율) 조헌(趙憲·1544∼1592)이다. 두번째 시조의 저자에 대해서는 조헌과 송인수 설이 엇갈린다. 본란은 조헌설을 따르기로 했다.

이처럼 조헌은 본래 문재(文才)가 대단한 문인이자 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자 경세가였다. 특히 그는 율곡 이이를 존경해 율곡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호를 후율(後栗)로 짓기도 했다.

그는 한 때 보은현감을 역임했다. 보은군 수한면 차정리에 사당 후율사(後栗祠)가 위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은의 유림들은 1832년(순조 32) 송흠요 등 28명의 발의로 조헌의 사당을 건립했다.

경기도 김포가 고향인 조헌은 10살 때 생모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모를 정성으로 모셨다. 그가 보은현감을 자청한 것은 계모를 모시기 위함이었다는 구전도 있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자 그 계모는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무고가 있었으나 선조는 조헌의 선정과 명망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지 사간원의 청을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보은현감 조헌(趙憲)이 어리석고 각박하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많이 유산(流散)하고 있다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는 전에 그 사람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들었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선조실록>

이렇듯 문풍과 효성을 겸비한 시골 선비 조헌이 임진년에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것은 절의정신 때문이었다. 그의 유연(柔軟·부드럽고 연함)함 뒤에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의식이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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