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 독립투사 애국심 배웠으면"

독립운동가 경석조씨 아들 경성호옹
"일본에 만큼은 뭐든지 다 이기고파"
내년 청주 삼일공원에 추념비 건립

2012.08.13 20:17:55

내 고향은 괴산군 연풍면. 나는 농사를 짓고 한학을 공부했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나를 닮은 아들과 함께 행복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었다. 사방에서 나라를 잃은 설움에 울고 짖는 소리가 들렸다. 통탄할 일이었다. 이 나라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라를 되찾아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고향 괴산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았다. 1919년에는 사람들을 3·1운동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독립투사에 대한 일제의 감시망이 좁아지면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아내와 아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들을 두고 떠나는 편이 안전했다. 내 이름은 회춘 경석조. 나는 독립투사이자, 비정한 아비였다.

회춘의 외아들인 경성호(86)옹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를 회상할 때만큼은 그의 눈빛이 소년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아버지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자'셨어. 배움을 토대로 사람들을 일깨우고 나라를 되찾도록 힘쓰셨지"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아들인 경옹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신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일본 순사들만 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살이는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의 소일거리를 도와서 얻은 음식으로 끼니를 채웠다. 독립투사 아버지와, 노심초사 아버지를 그리는 어머니 그 속에서도 경옹은 선생님이 됐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라 잃은 서러움을 이겨내려면 배워야 했죠"라며 웃었다.

그는 대전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해 교직생활을 하다 용담초등학교에서 퇴직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일본한테 만큼은 뭐든지 다 이기고 싶어.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항상 열심히 해서 일본을 앞질러야 한다'고 강조했죠"

수차례 일본경찰에 붙잡히고 그때마다 심한 고문과 매질 탓에 아버지 회춘 경석조는 1957년 58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경옹은 고단했던 아버지의 삶도, 외로웠을 어머니의 삶도, 불우했을 자신의 삶도,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와 같은 독립투사들이 피 흘려 나라를 되찾아 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가 "좋은 소식을 하나 들었다"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년 광복절까지 청주 3·1공원에 충북출신 독립운동가 추념비가 세워진데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추념비을 통해 독립투사들의 애국심을 배우길 바랍니다."

/ 백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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