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의 시신을 거두다, 아우 조범

2012.08.16 16:04:06

조혁연 대기자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인 것으로 보고 있다.일월록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고 선조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 헌의 아우 범(範)이 진터에 들어가 깃발 밑에서 시체를 거두었다.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그 곁에 죽어 있었는데, 4일 동안이나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성낸 기운이 발발하여,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오래 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조헌과 동시대를 산 인물 중에 장유(張維·1587∼1638)라는 선비가 있다. 이런 시를 지었다.

'(...) 평소의 간절한 충언, 업신 여기다가 / 죽어서야 임금께서 알아주셨네 / 천추의 한 되고, 만장하신 그 뜻 / 일월과 함께 빛날, 높으신 명성 / 황천에 다시, 영웅의 뼈 모시려 하니 / 무한한 풍운에, 초목도 슬퍼하나이다.'

그는 조헌의 순의비 옆을 지나가다 또 이런 시를 읊었다. 제목은 '趙重峯一軍殉義碑'다.

'음울하게 개지 않는 한 맺힌 가을 날씨 / 충사는 흔적 없고 누런 먼지만 자욱하네 / 위태로워져서야 비로소 깨달은 그의 충언 / 군대는 패했어도 오랑캐 기세 꺾였어라 / 청산에 남아 있는 외로운 빗돌 하나 / 천 년의 그 의기(義氣) 아직도 벽력 울리는 듯 / 양공의 타루비(墮淚碑) 거론할 것 뭐가 있나 / 영웅들 길이길이 슬픔 가누지 못하리라

권필(1569∼1612)이라는 인물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았던 그는 부인이 금주를 권하자 시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그런 권필이 조헌의 추모시를 지었다.

'몇 번이나 주운(朱雲)처럼 대궐 난간을 꺾었던고 / 오래도록 초택(楚澤)의 굴원처럼 나홀로 깨어 있음을 읊었도다 / 알겠구나, 큰 군자는 / 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 곧은 기개는 하늘과 땅에 드높도다 /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같이 빛이 나네 / 우뚝이 솟아 있는 금산의 산빛은 / 만고에 푸르기만 하여라'.-<일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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