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의 그림자' 함께 죽다, 이광륜

2012.08.21 16:24:11

조혁연 대기자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중봉집>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光輪·1546∼1592)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관이 여주이고, 출신지는 한양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의 벼슬을 받았다. 부친은 병절교위 이우(李遇), 동생은 이광복(李光福)이다.

그는 1546년생으로, 조헌(1544년생)보다는 두 살 어렸다. 따라서 그는 조헌 밑에서 직접 학문을 연마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임란 발발과 함께 조헌과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같이 한 인물이 바로 이광륜이다. 그는 관군의 방행가 심할 때 몸소 나서 향병(鄕兵) 3백명과 병기를 모았다.

'처음에 헌이 이미 주장(主將)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해볼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문하생 전승업·김절 등과 더불어 충청우도로 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 등 네댓 사람이 의병을 모아 가지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드디어 7월 4일에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니 그 군사가 무릇 1천 7백 명이었다.'-<연려실기술>

이렇게 모아진 의병들이 처음 참가한 전투가 바로 청주성로, 1592년 음력 8월 1일이다.

'부대를 나누어 정산·온양 등지를 순회 무마하여 위풍과 기세로 통제하니 민심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그 때 적이 바야흐로 청주에 자리잡고 있어서(…) 조헌이 듣고 급히 청주로 향하였다.'-<연려실기술>

이들은 청주 빙고현, 즉 지금의 모충동 고개에 집결해 있다가 청주성 남문을 공격, 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그는 청주성 전투 18일 후 조헌과 함께 다시 충남 금산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절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료에 짧막하게 등장하나 '우애와 절개가 있었다'고 표현했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李光輪)은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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