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일기 '쇄미록'에 황간이 등장한 까닭

2012.09.02 16:39:28

조혁연 대기자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쓰여진 개인일기로 '쇄미록'이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여 동안 썼다.

현재 해주오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쇄미록은 7책 분량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참상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생활상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 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1096로 지정돼 있다. 쇄미록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전'(詩傳)에서 발췌됐다. 시전에는 '쇄혜미혜 유리지자'(쇄兮尾兮 遊離之子)라는 표현이 있다. 첫 글자 '쇄'는 '銷'자에서 '金' 대신 '王'자이다.

오희문이 쓴 '쇄미록'

쇄미록은 이 문장 중 '쇄'와 '미' 자를 따와서 만든 표현이다. 해석하면 '부서지고 자잘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에 전국을 피난하면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오희문은 조선 중기인 중종과 광해군 연간을 살았던 인물로, 아버지는 장성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이고 어머니는 고성남씨 남인(南寅)의 딸이다. 그의 아들 윤겸(允謙)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로 1천5백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주장하자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처형당한 오달제(吳達濟)는 그의 손자가 된다.

오희문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소년기의 대부분은 외가가 있는 우리고장 영동군 황간에서 보냈다. 쇄미록에는 이런 표현이 보인다.

'이튿날 무주를 지나 영동의 삼촌 숙모의 집에 도착하니 삼촌은 浮症으로 인해 증세가 매우 위태로왔다. 여러 종형제(사촌)가 모여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뻤으나 삼촌의 병으로 인해 함께 즐길 수 없었다.'-<쇄미록 임진남행록중에서>

그 다음에는 바로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하루를 머물고 황계의 남백원 집으로 갔다. 백원은 곧 나의 종형으로서 어렸을 때 함께 외조모에게서 자라 정이 친형제와 같다. 외조의 산소에 잔을 올리고 지난 날 나를 기르시느라 애쓰신 은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내가 이 시골에서 태어나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으니 은혜가 어머니와 같다.'-<〃>

서두에 '황계'라는 지명이 보인다. 바로 황계는 추풍령이 있는 지금의 황간을 일컽고 있다.

오희문의 외가인 '고성남씨' 문중이 황간에 정착한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선전기 명신의 한 명으로 '남수문'(南秀文·1408∼1442)이 있다. 그는 우리고장 영동 인물로, 묘소가 학산면 박계리 덕령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애주가로 유명하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수문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술을 좋아하여 늘 과도하게 마셨다. 세종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셔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면 공은 꼭 커다란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는데 말은 비록 석 잔이라 하였으나 실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었다.'-<세종실록>

이런 이유로 쇄미록에는 영동, 황간 등 우리고장 얘기도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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