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를 묻으려 해도 제 힘으로 못옮겨, 쇄미록

2012.09.04 15:58:56

조혁연 대기자

전회에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9년여 동안 피난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전북 장수로 피난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들이 현감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강으로 도피하고, 나머지 4년은 지금의 충남 부여 임피면에서 생활한다.

그는 평강에서 50개월 가량 머물면서 역둔전 등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으며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아들 윤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강시절을 제외하면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가장 많이 했다. 임진년 음력 8월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산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점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추석)으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오희문은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전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비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노비를 수시로 관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보고토록 했다. 임진년 음력 8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 조헌과 참장 이천준은 때에 맞는 인걸로서(…) 승리를 거두어 행동하는 것이 옛사람과 같으니…'

이때의 승리는 청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그러나 조헌은 전회에 소개한대로 이로부터 8일 후에 충남 금산전투에서 전사한다.

오희문 묘

오희문의 눈에 비친 임진왜란의 실상은 참상을 훤씬 넘어서는 것으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먼저 굶주림이 심하다 보니 가장이 가족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오희문은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계사년(1593년) 음력 7월 15일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길에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남편이 母子를 버리고 갔다고 한다. (…) 비록 새와 짐승이라도 또한 모두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데(…) 어찌 이렇게 지극한 데에 이르렀으리오.'

가족의 시신을 제때 수습하지 못해 길가에 방치해 놓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임란 2년 후인 갑오년(1594) 7월 15일 일기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길에서 죽은 시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그 뼈를 묻으려 해도 제 힘으로 옮길 수 없으니(…) 슬프고 탄식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다룬 사료에는 국토가 너무 황폐화해서 당시 사람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표현이 더러 등장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쇄미록에도 그런 표현이 등장한다. 오희문은 갑오년 4월 3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먹는다 하기에….'

이어지는 문장은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 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 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쫓아가서라도 죽여 놓고 먹는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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