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복한 노비 밉고도 밉다, 황간외가 오희문

2012.09.16 18:30:46

조혁연 대기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영동 황간이 외가인 오희문은 이들 노비를 세습, 매득(買得), 별급(상속이나 증여) 그리고 유망비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확보했다.

유망비는 주인집을 도망쳐나와 떠돌아다니는 노비를 말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오희문 노비들의 물품교역에는 우리고장 지명도 등장한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외가가 있는 영동으로 목화를 사러온 사례가 기록돼 있다.

1596년 음력 윤달 8월 16일자 쇄미록을 보면 '덕노'라는 노비가 외가가 있는 영동 황간에 와서 목화 12근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총 15일이었다.

'덕노'는 오희문 집에서 충성도가 가장 높았던 노비로, 이듬해 겨울에 서울로 미역을 팔러 갔다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을 잃기도 한다.

김홍도 그림 속의 봇짐.

조선시대 노비들이 매번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가는 아직 완벽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주막이 대중화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오희문은 1592년 음력 9월 11일자 일기를 이렇게 썼다.

'다만 어린 종 하나 뿐이고 말이 없어서 내가 비록 걸어가더라고 노자를 지고 갈 수 없으니 이것이 고민스럽다.'

인용문 중 '노자'(路資)는 돈(錢)이 아닌 여행 중에 필요한 식량, 이불 등을 의미하고 있다. 돈이었으면 '지고 갈 수 없으니'라는 표현을 할 수 없다. 이는 화폐경제와 주막문화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 노비들은 이동 중의 식사를 미숫가루에 많이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에는 "우구(雨具)와 미슷가루(麻+米食)와 마른 말먹이풀(乾馬枓) 등의 물건도 또한 잘 살피어 예비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조선후기 보부상들은 생쌀, 마른 반찬, 작은 단지솥 등을 지니고 다니면서 물가에서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노비들도 이런 방식을 병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잠은 작은 이불을 가지고 다니면서 남의 집 헛간이나 낙엽더미에서 잤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반들은 주로 친척집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여행중 숙식을 해결했다.

교역을 담당했던 조선시대 노비들은 먼거리 이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이를 착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희문은 이것 때문에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그는 1594년 5월 8일 쇄미록을 이렇게 적었다.

'명복이 함열에서 왔는데 함열태수가 쌀 3말, 살아 있는 준치 2마리, 맑은 꿀, 녹두 1되를 보냈다, 다시 되어보니 쌀은 5되가 적고, 준치와 꿀은 길에서 빼앗겼다고 한다. 어둘 무렵에 돌아온 것을 보면 필시 생선을 굽고 밥을 지어 먹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다음 일기 문장을 '꿀은 병앓는 집에서 많이 찾는 것이니 역시 중간에 팔아먹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니 밉고도 밉다'라고 썼다.

물품을 준 쪽에서는 항상 수량이 적힌 편지를 써줬기 때문에 노비의 착복이 있었는가 여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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