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렷던 지명, 淸州와 靑州·保齡과 保寧

2012.10.29 09:31:54

조혁연 대기자

카리스마가 강했던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행정지명 '州' 자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과감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 고을이 아니면서 '州' 자가 붙은 제주(堤州), 진주(鎭州), 옥주(沃州), 괴주(槐주) 등은 각각 지금의 제천, 진천, 옥천, 괴산 등으로 개명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州' 자를 갖고 있지 않은 행정지명은 태종의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명산 속리산을 끼고 있는 보은군이 이에 해당한다. 행정지명 '보은'에 대한 시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로 올가간다. 고려사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보령군은 원래 신라의 삼년산군인데 경덕왕이 삼년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보령군(保齡郡)으로 고쳤다."
 
이때의 '보령군'이 바로 지금의 보은군이다. 인용문 중 고려 초기는 태조 23년(904)을 일컫고 있다. 이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개명된데는 약간 해프닝적인 면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충남에도 발음이 똑같은 '보령군'(保寧郡)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당시 '보령군'이 지금의 '보은군'으로 바뀌게 됐다.
 
'군현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이에 청주(靑州)를 북청(北靑)이라 하고, 양주(襄州)를 양양(襄陽)이라 하고, 영산(寧山)은 예전 이름 그대로 천안(天安)이라 하고, 보성(甫城)은 예전 이름 그대로 진보(眞寶)라 하고, 보천(甫川)은 예전 이름 그대로 예천(醴泉)이라 하고, 횡천(橫川)은 횡성(橫城)이라 하고, 보령(報令)은 보은(報恩)이라 하였다.'-<태종실록>
 
이때가 태종 16년(1416)이다. 따라서 보은군이라는 지명이 생긴 지는 올해로 598년이 된다. 그러나 잦은 지명 변경에 조선시대 사관(史官)도 헷갈렸다. 세종 연간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사관이 이렇게 적었다.

1872년 보은현 지도이다. 읍내 표시가 보인다.

 
'충청도 보은현(保恩縣)에서 지진이 일어났다.'-<세종실록> 물론 보은현의 '보'는 '報'로 표기해야 옳다. 앞서 인용한 문장 중에는 '청주를 북청이라고 하고'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부분은 충북의 수부(首府)인 청주(淸州)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
 
지금의 북청은 이른바 '북청 물장수'로 잘 알려진 곳으로 함경남도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후기 한양에 와서 물장수로 자식을 잘 키운 사람이 많아 유명하다. 시인 파인 김동환(金東煥·1901∼?)은 그런 '북청 물장수'(시제목이기도 함)를 시로 노래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 북청 물장수 // 물에 젖은 꿈이 /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 북청 물장수'.
 
'북청'은 조선 초기에는 '푸를 청'(靑) 자를 써서 '청주'(靑州)라고 불었다. 한자만 다를뿐 우리고장 청주(淸州)와 발음이 똑 같다. 조선 조정은 혼선이 자주 야기되자 '북녘 북' 자를 쓴 '북청'(北靑)으로 개명했다. 김동환은 함경도 경성이 고향이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6.25 때 납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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