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과 음성은 '지명 동기'가 된다

2012.10.30 16:40:33

조혁연 대기자

조선전기 '고을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행정지명으로는 보은 외에 영동, 음성, 단양 등도 있다. 3개 지명은 '州' 자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태종의 행정지역 개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먼저 행정지명 영동(永同)이 만들어진 과정이 흥미롭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동군은 본시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영동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이때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이다. 따라서 영동군이라는 행정지명이 생긴 지는 올해로 1255년이 된다. 꽤나 오래 된 편이다.

이와 관련, 어떤 어문학자는 인용문에 등장한 '길동군'과 지금의 '영동군'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영동군 할 때의 '길영' 자를 이두식으로 훈차(뜻만 빌림)하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행정지명 음성(陰城)이 태어난 과정도 앞서 언급한 영동군과 역사적인 분위기가 거의 비슷한 면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음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바로 음성이라는 행정지명도 영동군과 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태어난 지명이다. 이를테면 '지명 동기'인 셈이다. 음성군은 조선 선조 25년 지금은 면이 된 이웃 청안현에 잠시 예속된 적이 있다. 이 부분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갈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상당 기간의 음성현은 지금의 읍성읍과 원남면 정도를 합친 규모였다.

단양군의 농산물 공동 브랜드인 '단고'을 상표로, 나름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충북의 최북단인 단양은 '붉다'(丹) 이미지를 계속 지녀왔다. 단양을 '丹고을'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적산현으로 경덕왕 때 단산현으로 고쳤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는 '단산현은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으로 충숙왕 5년(1318)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승격시켰다"라고 적었다. 단양이라는 행정지명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이다. 따라서 현재 지명 '단양'은 대략 690년의 역사를 지닌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왜 단양이 붉다는 이미지를 계속 유지했는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다만 일부 어문학자는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표현에서 지금의 단양이라는 행정지명이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의 '연단'은 신선들이 먹는다는 환약, '조양'은 햇빛이 따스하게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왠지 단양이 지니고 있는 빼어난 경관의 이미지가 계속 느껴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고장 행정지명 설명을 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 있다. 바로 본명이 김헌영(金憲英)인 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이다. 이름 '헌영'과 시호 '경덕'에서 보듯 한자 냄새가 물씬 풍긴다.

경덕왕은 귀족들의 힘이 커지자 이에 맞서 왕권강화책을 추구했다. 이때 권위를 높이기 위해 취한 조치가 땅이름과 벼슬 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고 부른다. 이때 우리고장 외에 사벌주는 상주, 수약주는 삭주(춘천)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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