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통폐합을 거부하다, 충청감사 남지

2012.11.01 16:37:23

조혁연 대기자

태조 연간에 조준이 올린 상소문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

'경제육전의 예에 의하여, 매양 목(牧)에만 주(州)라 칭하고, 부와 군에는 일체 주를 칭하지 못하게 하여, 주·부·군·현으로 하여금 각기 명실상부하게 대소 군현간에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아랫 것으로 윗 것을 이어받게 하면….'

세종도 경제육전을 명분삼아 행정지명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때의 개혁은 단순히 '州자' 남용을 바로잡는 것만이 아닌, 작은 고을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고을 수는 많으나 그곳에 파견할 인재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고을에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에 고을을 맞추는 셈이 됐다. 도승지 안숭선의 상소다.

'본국의 주군의 수는 327군(郡)이나 되오니, 한정이 있는 인재로 어떻게 공수·황패같은 재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메꾸어 임명할 때에 인재를 얻기 어려우므로 도리어 자주 체임시키는 걱정이 있게 되오니, 작은 고을들을 병합하여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여 보내면…."-<세종실록>

남지 묘는 우리고장 진천 문백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같은 조치에 따라 경기도 교하현(현 파주시)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교하현은 고양(高陽)과 원평(原平)에 끼어 있어 형세가 궂은살과 같으며, 남쪽으로 고양과의 거리가 일식경(一息頃)이요, 동쪽으로 원평과의 거리가 일식경이니, 마땅히 교하현을 혁파하여 고양과 원평에 나누어 소속시킬 것이며…'-<세종실록>

지금의 전남 화순군도 혁파의 대상이 됐다. 세종실록은 '능성현은 사방 이웃과의 거리가 중앙이 되니, (…) 마땅히 화순현을 능성현에다 합쳐야 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우리고장 충청도에서는 고을 통폐합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전기 남지(南智·?~1453)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종으로부터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칭병을 이유로 고사했다.

그가 당시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아전과 관노비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충청도 내의 고을 통폐합을 비껴갔다.

'신(臣)의 의견으로는 별로 합칠 만하고 도태시킬 만한 고을은 없는데, 만약 반드시 그 중에 토지가 넓지 못하고 사방 이웃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각 고을을 강제로 합치게 한다면, 안심하고 대대로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아전과 관노비 등이 분묘와 전택을 버리고 이사하게 하는 괴로움과…'-<세종실록>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조선 전기에 서로 앞글자를 차지하려는 지명 분쟁이 발생했다. 두 고을이 '안비'냐, '비안'이냐를 놓고 싸웠고 결국 '비안'이 이겼다. 지금의 경북 의성이다.

'경상도 감사가 계하기를, "안정(安貞)과 비옥(比屋)을 일찍이 합쳐서 안비현(安比縣)이라 하였는데, 안정은 인물도 적고, 관사도 없으며, 비옥은 인물도 풍족하고, 관사도 구비되었으니, 이름을 비안이라 고치고, 비옥으로 본현을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행정개편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면이 있다. 조금 전에 언급한 충청감사 남지의 묘가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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