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와 조치원, 반비례 관계가 되다

2012.11.20 18:08:47

조혁연 대기자

청주-조치원 사이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4월이었다. 그러나 첫 영업자는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 織居加一이었다. 그는 경무부 허가를 받아 매일 2회씩 청주와 조치원 구간에 영업용 승용차를 운행했다.

이후 이 일본인은 재미를 봤는지 '조선자동차운전회사'라는 여객운수회사를 차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미원,진천 등에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영업용 자동차를 배차했다.

청주-충주간은 처음에는 여객의 왕래가 적어서 승객의 수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승객이 점차 늘면서 짝수일에 1회씩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청주 연혁지'(1923년 출간)를 쓴 오꾸마쇼지라는 일본인은 책에서 청주-조치원 신작로와 함께 주변도 설명했다. 그 내용이 다소 이채롭다.

'고문경찰시대에 조치원 도로가 개수되어 겨우 도로다운 형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는 하나의 당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에 덕망이 높은 인격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우의 비석은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당우와 당우의 비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의동에 위치한 송상현 사당과 신도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조치원을 가리켜 '충북같은 충남'이라고 일컽고 있다. 생활권이 같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장시망도 일조를 했다.

우리나라 제 1호 자동차다. 분명치는 않으나 청주-조치원 구간에도 이런 차가 운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장날은 청주가 2.7일, 오창이 3.8일, 조치원이 4.9일, 부강이 5.10일, 문의가 1.6일이었다. 당시 보부상들이 대장이 서는 청주를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조치원도 포함돼 있다.

하천을 사이로 생활권이 같았던 두 지역은 물싸움도 자주 했다. 그 정도가 심했던지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본조 허만석(許晩石) 정사는 근검을 위주로 하였다. 현 북쪽 15리에 냇물을 막아 큰 방죽을 만들어 천 경(千頃) 남짓한 논에 관개하였는데, 그 방죽이 청주 지경에 있다. 처음 방죽을 쌓을 적에 만석이 몸소 이를 감독하니, 청주 사람 천명 백명이 떼를 지어 와서 불손(不遜)한 말을 하고…'-<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어지는 내용을 '만석이 걸터앉는 호상(胡床)을 꺾어 버리므로 만석이 활을 당겨 쫓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죽이 이루어지자, 백성들이 그 몽리(蒙利)에 힘입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라고 썼다.

구한말 조치원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과 반비례해 충주는 쇠잔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경부선 철도의 등장이었다. 통감부 시절 일본관리가 도청이 있는 충주에서 서울에 가려면 1주일이 걸렸다. 일본 관료들은 이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또 충주가 충북의 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도 고려됐다.

일본관료는 1908년 충북의 도청을 경부선과 가까운 청주로 기습적으로 이전했다. 오꾸마쇼지는 '청주연혁지'에서 기억에 의존해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적었다.

'1908년 6월 4일 주요 서류를 여행 보따리에 챙겨 질풍노도와도 같이 충주를 떠나 청주로 향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중대 문제는 절대로 오랫동안 비밀이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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