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을 군수창고로 활용하다, 이시언

2012.11.22 16:55:54

조혁연 대기자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우리고장 진천출신 이영남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는 그날의 전투가 생각보다 격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이 이시언(李時言·?∼1624)이다.

현재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고건축으로 여수 진남관과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등이 남아 있다. 바로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진남관은 국보 제 324호, 충민사는 사적 제 3891호로 지정돼 있다.

그는 또 삼도수군의 사령부를 가배량(加背梁·현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이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 시민들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을 '충무'에서 '통영'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시언이 수군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안으로 가기 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병사'는 지금으로 치면 향토사단장 쯤이 된다. 그는 이같은 무훈 때문에 일종의 특별 진급인 가자의 대상이 됐다.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싸울 적마다 선두에 나서서 많은 적을 참획하고 돌입한 왜적을 사살하거나 손으로 베고 왜장을 사로잡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가자(加資)하도록 하라."-<선조실록>

이시언은 충청도병사로 있으면서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난의 '배고픔'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몽학은 아예 왕조를 타도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들에게 피살됐다. 이때 이몽학의 참모 역할을 한 인물로 한현(韓絢)이 있었고, 그를 제압한 사람이 이시언이다.

'충청병사 이시언의 서장에, "역적 괴수 한현(韓絢)을 올려 보냅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은 없었지만 역적의 괴수를 한 시각이라도 지체하여 머물러 둘 수 없기에 차사원을 정하여 압송합니다. 역적 괴수 김팽종을 홍주에 사는 생원 이익빈이 사살했기에 머리를 베어 함 속에 담아 보냅니다." 하였는데…'-<선조실록>

보은 삼년산성은 임진왜란 때 충청병사 이시언에 의해 군수창고로도 활용됐다.

보은 삼년산성은 일부 보수를 했지만 오랜 역사에 비해 성곽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편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보은 삼년산성은 성(城)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시언은 삼년산성을 군수창고로도 활용했다.

'충청도는 조금은 두서(頭緖)가 있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병사 이시언이 삼년성을 지키고자 하여 이미 그곳에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옮겼다고 합니다. 삼년성의 길은 황간·영동과 접해 있어 적의 길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선조실록>

유성룡이 선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으로, 인용문의 '두서'는 일의 짜임새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시언의 마지막은 억울함으로 매우 불행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 도성으로 접근하자 내응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시언, 기자헌 등을 참수하고 공주로 도망혔다. 이시언이 이괄과 가깝다는 이유였으나 조작된 고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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