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같이 동그란 담장을 지녔다, 충청도 獄

2012.11.25 16:30:18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갑오경장 무렵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말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전옥서(典獄署)라는 관청이 이 조선시대 옥을 총괄했다. 그러나 전옥서라는 명칭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개국 직후부터 벌써 그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태조실록>

조선시대 옥에 대한 정보는 문헌 외에 의외로 고지도에 다수 남아 있다. 구한말이 되자 서구열강 세력이 밀물 듯이 몰려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흔히 말하는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로, 달리 사또 또는 원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행정, 군사 외에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군현 주변에는 옥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872년 군현지도에는 청주와 충주목 그리고 영동·청산·청풍현 등 5개 목현에만 옥이 그려져 있다. 왜 이같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조선후기 모든 옥은 동그랗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옥건물은 대개 남자동과 여자동 그리고 관리동 3개 건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전국의 목군현은 이 3개동 건물을 다시 높다란 원형의 담으로 둘렀다. 때문에 고지도 속의 옥도 원형에 가깝게 그려졌다.

이밖에 고지도는 원형 안이나 밖에 한자 '獄' 자를 써서, 건물의 용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군현마다 통일되게 그린 것은 아니었다. 청주옥은 원 바깥에 獄 자를 표기했다. 반면 충주옥은 원 안에 獄자를 표시했다.

청풍현 옥은 이보다 더 독특하다. 옥의 담장을 마치 성곽의 타구가 있는 것처럼 그렸다. 타구는 여장(낮은 담장) 사이의 공간으로 활이나 총을 쏘는 용도를 지니고 있다.

청풍현 獄은 유독 '令圄'라고 표시했다. 왜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다.

청풍현 옥은 그 안에 獄이 아닌 囹圄(영어)라고 써놨다. 이 또한 우리고장 다른 옥에는 없는 청풍현 옥만의 독특한 표기다. 이때 뒷말 '圄'는 옥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감옥시설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높다란 담장이다. 조선시대 옥 중 일제 강점기까지 남아있던 옥으로는 공주옥이 유명했다.

이 공주옥은 담 높이가 대략 1길, 즉 3m에 이르렀고 담장 두께는 약 1m 정도였다. 유관순 열사가 천안 아우내에서 만세를 부른 후 이 공주감옥에 갖혔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된 바 있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옥도 공주옥과 외형이 비슷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청주와 충주에는 읍성이 존재해었다. 읍성의 옥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당시 중앙정부가 통일된 기준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

1872년 군현지도를 보면 충주옥은 읍성서문 밖에 위치했고, 청주옥은 지금의 철당간과 흥업백화점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1872년 군현지도에 그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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