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의 칼을 받다, 보은 이인관

2012.11.27 16:12:14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옥에 갖힌 죄수들은 야간에는 통 2개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나졸들이 넣어준 통 중 큰 것은 대변용, 작은 것은 소변용이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시대 옥의 이같은 환경을 크게 비판했다. 다산은 조선옥의 열악한 환경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섯 가지 고통이라는 뜻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갈취)을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갖혀 있는 고통 등을 말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옥하면 참수형을 집행하던 망나니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에서는 백정을 망나니로 삼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따라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대신, 이들을 망나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이런 망나니에게도 뇌물이 건네지는 경우가 있었다. 사극을 보면 죄인을 꿇어앉힌 후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윤보라는 인물이 그린 '형정도첩'이라는 그림을 보면 죄인을 땅을 보고 눕게 한 후 망나니가 목 위에서 칼을 내리쳤다. 이때 죄인 가족은 여러 번이 아닌, 단칼에 베어달라는 뜻에서 망나니에게 뇌물을 주어졌다.

왜 그랬는지, 더이상의 설명은 잔인한 것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속참행하'(速斬行下)라고 불렀다. 소설어사전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죄인의 목을 신속히 떨어지게 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망나니를 한자로는 '회자수'(會+刀子手)라고 적는다. '목을 베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조 임금과 충청도하면 이인좌의 난(1728)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로부터 5년 후 보은지역에서도 커다란 형사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우리고장 지명이 많이 나와 이해가 빠른 사건으로, 다수의 인명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망나니에게 뇌물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속참행하'라고 불렀다. 참형 모습.

'의금부에 명하여 죄인 이제동을 추국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보은 사람 이귀흥과 그의 형 이공형·이인관·이인기·이인복, 이인기의 아들 이둘로미, 이제동·이현동·김두병·박진좌·구준좌·구이후 등 10여 인이 흉년이 든 것으로 인하여 무리를 불러모아 협박하여 강도질을 하려고 했는데…'-<영조실록>
 
이들은 보은현이 청주목 소속이었던 만큼 일단 청주옥에서 심문을 받았다.

앞서 언급됐던 이인관이라는 인물이 "청주(淸州)의 감옥에 있을 적에 김두병(金斗柄)에게 묻기를, '상경(上京)하여 국문당할 경우 나무라고 지적하기도 곤란하고 돌이라고 지적하기도 곤란하다'고 했더니, 김두병이 아무아무가 함께 모여 말했다고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영조실록)라고 말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때가 1733년 음력 3월 26일이었다. 그 직전 이인관은 가혹한 장형 때문에 기절하기도 했다. '다시 이인관(李仁寬)을 문초하였다. 형장(刑杖) 19대를 치니, 기절하였다.'-<영조실록>

이인관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만에 망나니의 칼을 받고 물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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