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을 옹호하다, '산촌에 눈이 오니' 그 저자

2012.12.06 15:48:00

조혁연 대기자

전회에 송강 정철의 아들 종명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장문이고 또 정종명 혼자가 아닌, 동생 홍명(弘溟)과 같이 올린 상소문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호·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이라는 것도 있다. 더욱이 상소하는 대상이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다.

'신의 아비가 명종·선조 두 조정을 섬기게 되어서는 용호가 풍운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이 한때 견줄 데 없었으나 다만 강직한 충성 때문에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습니다.'-<인조실록>

정철은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놓고 무진 무진 먹세그려'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불같은 성격을 함께 지녔다. 두 아들은 '남과 화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은 아버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것이 아닌, 선조의 강권 때문에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위관(委官)은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 중에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 11월에 공을 우의정에 제수하고 역옥의 위관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공이 사퇴하기를 원하자, 임금이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목숨을 버리는 전례와 병을 참고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들어 돈면(敦勉)하였으므로 공이 나아가 사은하였다.'

이밖에 상소문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은 데는 성혼(成渾·1535∼1598)의 부추김도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성혼은 정철보다 한 살 위로, 같은 서인계 인물이다.

'신의 아비의 벗 성혼(成渾)이 파산(坡山)에 있으면서 분발하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이 옥사를 맡아 다스린다면 공정한 마음으로 혐의에 대하여 처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나라의 일이 매우 중한데 어찌 후환을…'-<인조실록>

경기도 광주의 신흠 신도비.

두 아들의 이같은 상소에 대해 인조가 보인 반응은 "정철의 일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였다. 이때 정철의 복원을 강력히 옹호하고 나선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신흠(申欽·1566∼1628)이다.

'우의정 신흠이 의논드리기를, "정철의 이름이 세상에서 거리낌을 받은 지 이제 30년이 되었습니다. 성명이 임어하시고서는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자가 없는데, 그 아들이 하소한 것을 신도 갖추들었습니다마는 실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만 정철이 강직하고 편벽되기 때문에….'-<인조실록>

신흠이 이렇게 나온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신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철이 충청도체찰사(都體察使)로 파견되자 그 밑에서 종사관(참모) 노릇을 했다. 둘 사이에 인간적인 인연이 이미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우리고장과 직접적인 인연도 있어, 직전에는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을 따라 충주까지 행군했다. 그는 시조 '산촌에 눈이 오니'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 시비(柴扉·사립문)를 여지 마라 날 찾즈리 뉘 이시리 /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청구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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