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묘를 찾아 읊다, 정철제자 권필

2012.12.11 15:03:00

조혁연 대기자

정철에게는 정여립을 단죄한 기축옥사의 업보가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임진왜란 와중에 명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선조의 신임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기축옥사의 한을 곱씹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모함을 받아 지금의 강화도 송강촌이라는 곳으로 방축됐다. 실각한 그가 왜 강화도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선조의 부름이 다시 있을 것으로 보고 한양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는 추정이 있다.

반면 그의 문인(門人·제자)인 권필(1569∼1612)이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권필은 젊었을 때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이때 역시 그곳에 건저의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정철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은 바 있다.

정철 제자인 권필의 필적.

권필은 이후 강화도에 정착, 그곳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혹자는 정철이 이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쫓기듯 들어간 강화도에서, 정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난과 병고였다. 그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간의 것인 즉 마음 편하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지인이 누군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정황상 정면이라는 사 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철은 말년에 정면에게 이런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다소 긴 시라 일부만 소개한다.

'동쪽 나라에 한 선비가 있어 / 얼굴이 붉고 마음도 또한 붉더라 / 술을 사랑하되 돈은 사랑하지 않고 / 시를 좋아하며 또 손님을 좋아하네.'-<송강집>

역시 술 얘기는 빼놓지 않고 있다. 정철은 강화도 생활을 오래 한 것 같지만 실은 한 달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 병고에 가난이 겹쳐 그쯤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음 시는 정철의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제목은 '납월 초6일 밤에 앉아서' 이다.

'외론 섬에 나그네 되어 해조차 저물었고 / 남쪽에선 아직 왜적을 물리치지 못했다네. / 천리라 편지 소식 어느 날에 올려는고 / 오경의 등잔불은 뉘를 위해 밝은 건가. / 사귄 정은 물과 같아 굽혀있기 어렵고 / 근심가닥 실오리처럼 풀면 도로 얽히네. / 다행히 원님이 준 진일주(眞一酒)가 있어 / 눈 쌓인 궁촌에 화로를 끼고 마시노라.'-<송강집>

역시 '진일주'라는 술 얘기는 빠지지 않고 있다. 1593년 12월 18일에 사망한 정철은 선산이 있는 고양시 원당면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그의 증손인 정양(鄭瀁·1600∼1668)과 우암 송시열에 의해 지금의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 봉죽면으로 이장하게 된다.

당시 이장의 주된 이유는 '묘 밑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송시열이 백두대간 서쪽 사면에 서인 벨트를 구축하려 정철의 묘를 청주목 산하인 진천으로 이장했다'라고 보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제자 권필이 스승 정철의 묘를 찾아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사제의 감회를 시로 읊었다. 역시 술 얘기는 빠지지 않고 있다.

'빈산에 잎 지고 궂은비 내리는데 / 재상의 풍류 또한 이같이 쓸쓸하네 /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 예전의 그 노래는 오늘을 말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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