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시대에 청주옥에 갇힌 사람들

2012.12.18 17:51:07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청주옥(獄)은 철당간과 흥업백화점 사이에 둥근 담장 모습으로 위치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조선전기 청주옥에 갇혔던 유명 인물로는 이색과 권근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돼 청주옥에 갇혔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파평군 윤이(尹彛)·중랑장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는 명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한 음모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색·우현보·권근 등 많은 대신들이 연루 혐의를 받고 청주옥에 갇혔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872년 군현지도의 청주읍성내 청주옥 모습이다. 그앞 조형물은 용두사지 철당간.

이어지는 문장은 "그해 여름에 이색 이하 여러 폄소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의 옥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라고 돼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중앙공원 압각수 설화다.

익히 알다시피 압각수는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매우 오래 된 은행나무를 말한다. 실록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여러 문사관들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으므로, 갇힌 자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다. 권근만은 홀로 꼿꼿이 앉아서 신색(神色)이 자약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 하였다. 이때 죽음을 면하여 (…) 신미년 봄에 자편을 얻어 충주로 돌아갔다.'-<태종실록>

인용문 중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바로 이 때의 나무가 중앙공원 압각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무신 집권기에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공주 명학소에서 난을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농민의 난을 굶주림 때문에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망이·망소이 난은 신분 상승을 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망이 망소이가 와서 항복하니 곳간의 곡식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감찰어사 김덕강으로 하여금 그의 고향에서 압송했다.'-<고려사>

인용문의 '그의 고향'은 공주 명학소로, 지금의 대전을 말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상식과 맞지 않는 면이 있다. 항복하면 벌을 받아야지, 곡식을 받았다는 것은 논리상 뭔가 맞지 않는다.

이때는 망이·망소이에 대한 고려조정의 회유책이 작동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같은 회유책에도 불구, 망이·망소이는 난을 다시 일으켰다가 체포돼 재수감된다. 이때 이들이 갇힌 옥이 바로 청주옥이다. 이같은 흐름대로라면 고려시대 청주읍성 안에도 옥이 존재했던 것이 된다.

'병마사 정세유 등이 망이·망소이 등을 잡아 청주의 옥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였다.'-<고려사>

이들이 왜 공주가 아닌 청주옥에 갇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죄인을 고향에 가두면 동조세력이 생겨날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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