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받음구, 충북 농요에도 등장한다

2012.12.30 14:03:01

조혁연 대기자

문헌상 19세기 초에 '아리랑'과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은 '만천유고'에 '농부가'(1790)를 남겼다.

'호미매여라 호미매여라 / 황혼월색이 만기간(滿旗竿)일세 //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啞魯聾) / 일석노담재주환(日夕農談載酒還)'.

후렴구 '아로롱'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로롱'이 아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다소 논란이 남아 있다. '아리랑'이라는 분명한 명칭은 생각보다 늦은 19세기말에 등장하고, 그 배경의 주인공은 고종이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들을 불러들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았다.(…)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충주 신니면 마수리의 모심기 농요 장면.

'아리랑' 할 때의 '랑'을 '아가씨 娘' 자로 적어고, 그리고 이를 '염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염곡은 이른바 남여상열지사의 노래를 말한다.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그에게 수많은 배우를 거느리고 아리랑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관락하다가 잘하는 부분과 못하는 부분에 대해 평하기도 하고, 결과에 따라 상방에 명하여 금과 은을 상으로 주라고 지시까지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大鳥圭介(오토리 게이스케)가 무력으로 궁궐에 침범하던 시기까지 계속되다가 그후 그만두었다.'

인용문 중 오토리 게이스케(1833~1911)는 일본의 군사학자이자 외교관, '상방'은 조선 시대 임금의 의복, 일용품, 보물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를 말한다. 민영주(1846~?)라는 인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899년 송정섭, 강견희 등과 공모, 정부로부터 월미도 개척권을 인가받아 그 이권을 일본인 요시카와에게 일화 3만9천원을 받고 팔았다.

인천을 한 때 '제물포'라고 부른 적이 있다. 바로 월미도의 이칭인 제물도(濟物島)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당시 월미도 사건의 사회적 파정은 적지 않아 대부분 '유십년'(귀양) 등을 받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민영주의 해괴하고 고약한 행동은 도리어 깊이 따질 나위도 없었으므로 즉시 법부로 하여금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 법부에서 복주한 것으로 인하여 황주군 철도(鐵島)에 유십년(流十年)하라" 하였다.'-<고종실록>

이상에서 보듯 문헌상 첫 등장한 아리랑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이런 아리랑은 순수 아리랑 뿐만 아니라 농요에도 등장한다.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의 모심기 노래인 '아라성'은 '아라리아 아라리요 아리랑 얼사 아라성아', 청원군 미원면의 밭매는 소리는 '아리아리 아리아리 스리스리 스리스리 아리랑 고개고개를 나를 넨겨주게'라는 받음구(후렴구)를 갖고 있다.

전자는 정선아리랑과, 후자는 밀양 아리랑과 선율이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두 농요를 넓은 의미의 아리랑으로 볼 것인지 여부는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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