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 고충'을 상소하다, 단양군수 황준량

2013.01.15 15:51:07

조혁연 대기자

뗏목은 '목재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나무'로 정의된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남한강으로 뗏목이 운반됐다. 이 뗏목은 일반 배와 많이 달았다. 또 그 자체가 나중에 상품으로 팔렸기 때문에 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종사자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됐던 셈이다.

그러면서 뗏목은 뗏사공을 운송했다는 점에서 운송수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뗏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뗏목은 크게 벌목, 목재운반, 엮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먼저 벌목은 낙엽이 진 이후인 음력 10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여름에 나무를 베면 청태가 끼거나 뒤틀림 현상이 심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졌다.

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영농철이라 인력동원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벌목을 했으면 일단 산 밑으로 운반해야 했으나 그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임도가 거미줄처럼 뚫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질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통길'과 '목도'라는 방법으로 산속의 소나무를 산 밑으로 운반했다. 통길은 잡목을 제거한 후 경사면 아래로 미끄럼 길을 내, 통나무를 운반한 것을 일컫는다. 목도는 두 사람이 줄과 가로 막대로 어깨걸이를 해 통나무를 산밑으로 운반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운반된 목재를 하천 옆에 쌓아둔 것을 '집목장'이라고 불렀다.

소나무를 산 아래로 운반하는 방법의 하나인 '목도' 모습이다.

조선 명종대(16세기)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라는 단양군수가 있었다. 뗏목을 만들기 위해 소나무를 벌목하고 운반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자 그가 임금 앞으로 10개 항으로 된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첫째는 재목(材木)에 대한 폐단입니다. 각 관사에 공납해야 될 크고 작은 재목이 연재(椽材)가 4백 개에 이르고 산목(散木)이 거의 수만 개가 되니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숫자입니다."-<명종실록>

인용문 중 연재는 서까래를, 산목은 곧지 않은 나무를 일컫고 있다. 황준량은 이어지는 내용을 "거만(巨萬)의 재목을 가지고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골짝을 건너 운반하자면 남녀가 모두 기진 맥진하고 소와 말도 따라서 죽게 되어 온 고을의 농가에 수십 마리의 가축도 없으니 백성의 고생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강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운반하므로 쉽게 공납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황준량이 올린 상소문에는 16세기 단양지역 백성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표현들도 생생하게 등장한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는 본래 척박해서 수재와 한재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용 중 '전지'는 밭, '항산'은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을 의미한다. 도토리가 식재료인 묵은 지금은 별미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 단양 사람은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식으로 먹어야 했다.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가 있습니다."-<명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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