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뗏목에도 선장이 있었다. 앞구잽이

2013.01.17 19:14:41

조혁연 대기자

남한강 뗏목은 얼음이 풀리는 우수·경칩이 지난다고 바로 운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 강물이 어느정도 불어나야 가능했다. 뗏사공들은 봄비로 물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뗏목을 엮는 방법은 △칡넝쿨이나 쇠줄로 붙들어 매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기 △쇠고리를 이음새로 박고 밧줄로 잡아매기 등이 사용됐다. 이렇게 완성된 뗏목배 하나를 '한동가리'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보통 25~35개 정도의 굵고 곧은 소나무가 사용됐다.

이렇게 영월이나 우리고장 단양 등 남한강 상류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자본가인 목상(木商)이 자비를 들여 '강치성'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에야 한양을 최종 목적지로 운반이 시작됐다.

뗏목 운반은 맨앞 사공인 '앞구잽이'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때 여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됐고, 뗏목이 출발할 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강치성을 드린 뗏목은 한번에 보통 5~7 동가리가 운반됐고, 이때 2-3명의 뗏사공이 동가리떼에 올라탔다.

그러나 뗏목도 배는 배여서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공이 필요했다. 뗏사공 중 제일 앞에 서는 사공을 '앞구잽이', 맨 뒤에 서는 사공을 '뒷구잽이'라고 불렀다. 이중 앞구잽이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앞구잽이는 각 지점의 여울, 수심, 유속 등을 머리 속으로 훤히 알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최고로 노련한 뗏사공이 앞구잽이 역할을 했다. 이 '앞구잽이'라는 표현은 뗏목 뿐만 아니라 상여소리에도 더러 등장한다. 토속어인 셈이다.

'허호 어허호 어이넘차 어허호 / 어티게 가나 어티게 가나 심산험로를 어티게 가나 / 시월 봄 한 철 가지를 마라 우리 인생 다 늙어간다 / 이리 가고 저리 갈 제 갈지자로 구비구비 돌아가세 / 앞구잽이 댕게주고 뒷구잽이는 밀어를 주오.'-<강원도 고성 상여소리 중에서>

뗏사공들은 일년에 많게는 6~7번의 뗏목을 탓다. 이중 처음 내려가는 뗏목은 '갯떼기', 마지막 뗏목은 '막서리'라고 불렀다. 갯떼기는 얼음이 풀리는 때, 막서리는 막 서리가 내린 시기를 의미한다.

뗏목 운반은 워낙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양에 무사히 도착한 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여기서 "떼돈 벌었다'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그러나 나루터 주막 여인들의 유혹을 이겨내야 했고, 또 뗏목이 중간에 파산되면 빈털터리로 육로를 따라 걸어 올라와야 했다.

우리고장 남한강 뗏사공이 운반한 것은 뗏목만이 아니었다. '아리랑' 같은 노랫가락도 운반했다. 남한강이 문화의 통로 역할도 했던 셈이다.

대표적인 것이 변형된 정선아리랑이다. 변형된 정선아리강은 우리고장 북부지역 뿐만 아니라 한양까지 널리 퍼져 있다. 바로 뗏사공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선아리랑은 남한강 하류로 내려갈수록 가사가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변형된 정선아리랑 가락 중에 '칼로 물친 듯이 뚝 떠나 가더니, 평창 팔십리 다 못가고서 왜 되돌아 왔나'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이 가락이 남한강 하류인서울에 와서는 '칼로 물벤 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못가고서 왜 또 날 찾아 왔나'로 바뀌었다. 강원도 '평창' 자리에 경기도 '이천'이 들어가는 등 미세하지만 변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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