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다리기 놀이로 발전하다, 목계 뗏목끌패

2013.01.24 17:31:15

조혁연 대기자

뗏목은 원시적인 배라 사고도 빈발했다. 여기에는 우리고장도 포함돼 있다. 성종 때 제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다 익사한 사고가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한강도승(漢江渡丞) 심지(沈智)라는 사람이 이런 보고를 한다.

"충청도 제천의 정병 김중선 등 6인이 본현에서 뗏목을 타고 양근군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리어 3인은 익사하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같이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원해 내었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도승은 조선시대 한강수계 7곳의 진(津)과 도(渡)를 관리하던 책임자를 말한다. 종9품이다. '진'과 '도'는 그 구별이 쉽지 않다. 다만 도하(渡河), 진강(津江)의 표현으로 미뤄, '도'가 좀더 규모가 큰 나루터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충주 목계 줄다리기 놀이는 뗏목 끌패문화와 관련이 있다.

사실 뗏목은 조선의 창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도 대형 뗏목사고가 발생했다. 익히 알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바로 그 직전의 상황에서 뗏목사고가 일어났다. 함께 출정했던 당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1390)의 상소 내용이다.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첫 번째 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두 번째 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인용문에 등장한 '주중'은 바로 회군의 반환점이 된 압록강 중간의 위화도를 의미한다.

조민수는 이어지는 상소문을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그 유명한 '4불가론' 중의 하나다.

우리고장 남한강 수계에는 여울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뗏목은 수심이 얕은 여울을 통과하는데 자주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갈수기 때가 가장 문제가 됐다. 이때 뗏목 운반꾼들은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강주변의 마을 주민들에게 '골세'라는 것을 줘야 했다.

골세는 여울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뗏목이 지나갈 수 있도록 강여울에 골을 판 후 수고비조로 받았던 삯을 말한다. 이 골세는 전통시대 때 영월 덕포 나루터와 충주 탄금대 합수머리 구간에 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충주 목계에서는 매년 별신제가 개최되고 있고, 이때 줄다리기 놀이가 단골로 등장한다. 민속 전문가들은 이것도 뗏목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도 목계 여우섬과 하안 사이에는 '막흐래기' 혹은 '막희락탄'으로 불리는 얕은 여울이 존재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에서 '끌패'라는 문화가 존재했다. '끌패'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끌어 올려주는 무리라는 뜻이다.

목계 끌패들은 뗏목이나 목선이 막흐래기 여울에 걸리면 그 배를 줄로 당겨 끌어올려주고 삯을 받았다. 민속학자들은 이 끌패문화가 목계 줄다리기 민속놀이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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