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망선루를 노래하다, 사림파 김종직

2013.01.31 17:51:41

조혁연 대기자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현종개수>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다스릴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백성들에게 임할 때면 반드시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사랑하고 보살피는 은택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진곡(賑穀)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 4천 석이나 되는데…"<영조실록>

조선시대 청주 망선루에는 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망선루는 청주읍성 안에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 문인과 사대부들이 즐겨 찾아 시문을 많이 지었다. 조선 중종 때의 인물로 이의무(李宜茂)가 있다. 그는 이런 산문을 남겼다. 청주 인근의 넓은 들과 석양의 풍경이 눈에 잡힐 듯이 들어오고 있다.
 
'이 누에 올라 쉬노라니, 먼 변방까지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그지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마음은 넓어지고 정신은 평온해진다. (…) 해는 져서 장차 함지(咸池)로 들어가려 하니, 꽃다운 것을 모두 잡아서 쉬게 하도다. 노복(奴僕)은 말(馬) 생각을 안타깝게 하여 우두커니 서서 돌아만 보네. 가는 길이 더디고 더딤을 한탄하노니, 큰 들은 아득히 평평하기만 하도다.'-<신증동국여지승람>
 
김종직은 조선 사림파의 실제적인 종조로 경상도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경상도-한양의 교통로인 충주 인근에 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유로 청주를 찾았던지 망선루를 제목으로 한 시도 남겼다.
 
'망선루 위에서 흥이 한창 무르녹으니 / 흰 머리털 쇠한 낯을 어찌 부끄러워하리오 / 좋은 술로 의당 하삭의 백 잔을 기울이리니 / 미인은 위성곡을 세번 노래하지 말아다오 /…/-<점필재집>
 
'위성곡'은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가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떠나는 친구를 전송하면 지은 시로, 지금도 친구간에 이별을 할 때 곧잘 인용된다.
 
'아침비가 위성땅 흙먼지를 적시니 / 주막집 버드나무 더욱더 푸르러라 / 여보게 이 술잔 더 비우게 / 서쪽 양관으로 떠나면 잔 나눌 벗도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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