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옥순봉도 읊다, 택리지 이중환

2013.02.05 16:11:40

조혁연 대기자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단양 옥순봉을 소재로도 시를 남겼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임사화는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고, 이번에는 목호룡이 목숨을 내놔야 했다.

이때 이중환도 단순히 목호룡과 친분이 있다고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절해고도와 변방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후 이중환은 해배, 즉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정치에 환멸을 품고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낙향한 사대부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했다.

이중환이 방랑벽을 지닌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교사의 자녀들은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 이중환에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는 스무살 이전까지 아버지 이진휴(李震休)의 근무지를 따라 거처를 여러번 옮겨야 했다.

이때 이미 방랑기질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9세 때는 안동으로부터 우리고장 단양을 거쳐 상경했다. 이때 단양에서 배를 타고 옥순봉를 지나며 지은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땅위의 높은 모양은 단정한 선비가 서있는 듯하고 / 물결 복판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늙은 용이 뒤집는 것 같다 / 정신은 빼어나 강산 경치가 뛰어나고 / 기세는 높아서 우주형상을 버티었다.

택리지를 정리한 장소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택리지 안에는 이런 글이 등장한다.

'옛날에 내가 황산강가에 있으면서 여름날 할 일이 없어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

바로 황산강 가의 '팔괘정'이라는 곳에서 글을 썼다는 얘기다. 학계에서는 이곳을 지금의 충남 강경읍 황산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황산동에는 '팔괘정'이라는 정자자리도 존재한다. 다만 '우연히'라는 표현 때문에 상주한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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