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성을 마지막으로 보수하다, 구세적

2013.03.21 16:19:23

조혁연 대기자

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청주연혁지>

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청주읍성에서 출토된 '丙辰'명 성돌.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를 실어다 고을 성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영조실록>

이어지는 내용은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라고 적혀 있다.

병진년 명문과 관련해 또 하나 눈여겨 볼 문헌사료는 1786년(정조 10)에 청주성을 수축했다는 내용이다.

'청주성을 수축하였다. 전 병사 김영수가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사 구세적이 모두 수축하였다. 둘레가 1천 4백여 보였다.'-<정조실록> 그러나 1786년은 앞서 밝힌 두번째 병진년인 1796년과 10년의 시차가 난다. 역시 논리가 잘 맞지 않고 있다.

인용문에 병사 구세적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청주읍성의 마지막 수축이 있던 1년전에 충청도 병사로 부임했다.

그는 충청병사로 재직하는 중에 청주읍성 외에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부정적인 내용이다. 연풍현의 봉수 관리가 문제가 됐다.

'연풍현 마골의 봉화는 경상우도 문경현의 탄항 봉화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탄항의 봉화는 비록 날씨가 맑은 때라도 간혹 봉화불을 피우지 않았으나, 마골의 봉화는…'-<정조실록>

이와 관련 구세적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다 도리어 처벌받는다.

'이윽고 김광묵이 아뢰기를, "구세적이 자기가 흐리멍덩했다는 것은 살피지 않고 이 문제를 먼저 제기하여 자신은 모면하고 죄없는 수령에게 잘못을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구세적을 처벌하고 조정옥은 유임하소서."하니….'-<정조실록>

결국 구세적은 봉수를 관할하는 병조에 붙들려가 문초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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