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기를 돕다 장인과 사위가 되다, 김한로

2013.04.23 16:09:13

조혁연 대기자

조선 전기를 산 인물로 김한로(金漢老·1367~?)가 있다. 그는 태종과 과거합격 동기생인 동방(同榜)이었다. 이것을 믿었기 때문인지 그의 행동은 항상 좌충우돌이었다. 그는 태상왕(이성계)이 중국사신을 위해 주최한 궁궐 잔치에 지각할 것처럼 보이자 역리(驛吏)의 말을 빼앗아 탓다가 파직을 당했다.

'판봉상시사 김한로가 파직되었다. 한로는 이때에 의순고 별좌로 있었는데, 태상왕이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사람을 시켜 길에서 역리의 말을 빼앗아 잡으려고 하니…'-<태종실록>

조선 최고의 난봉꾼 중의 한 명은 아무래도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일 것이다. 그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이 부분은 좀더 살펴볼 대목이 있다. 일국의 세자는 신분이 노출 때문에 기생이라는 천민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이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김한로다. 실록은 세자의 행동이었기 때문인지 이 대목도 역사의 한 단면으로 기록해 놓았다.

"세자가 밤에 창기를 들이었다. 몰래 내노(內奴)를 시켜 김한로의 집에서 말을 끌어내어 창기를 태우고자 하였다."-<태종실록>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묘.

물론 이때의 창기는 기생 '어리'를 일컫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세자 양녕대군의 이같은 난봉질은 기생 어리가 자결하면서 스캔들을 넘어 '왕실 게이트'로 발전했다. 당연히 양녕대군은 치죄를 당했고, 그 불길은 김한로에게 옮겨 붙었다.

'형조와 대간에서 다시 아뢰었다. "김한로가 주상의 뜻을 몸받지 아니하고 여색을 동궁(東宮)에 들이었고, 또 하문할 때에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가 한참만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태종실록>

인용문 중 여색은 기생 어리, 동궁은 세자의 거처를 말한다. 결국 양녕대군은 대신들의 상소에 등떠밀려 우리고장 청주읍성으로 방축됐고, 김한로 역시 청주를 거쳐 지금의 연기군으로 귀양가야 했다.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대신들이 "두 사람이 친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둘을 그렇게 가까운 곳에 유배시키면 되겠느냐"며 이배를 요구했다. 결국 양녕대군의 1년간 청주 유배생활이 끝나서야 이 문제도 해결됐다. 양녕대군은 비교적 장수해 69세에 졸했다. 이와 관련 실록은 그의 졸기를 이렇게 적었다.

'세종이 우애가 지극하였고 제(양녕대군 지칭)도 또한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여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함을 얻었다. 광산군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3남 4녀를 낳았는데…'-<세조실록>

성격이 좌충우돌 식으로 비슷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장인'과 '사위' 관계가 돼 있었다. 그렇다면 기생과의 외도에 말을 빌려줬던 그런 인륜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선전기의 궁궐 근처로 돌아가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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