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했던 1862년의 청주목

2013.06.18 15:58:37

조혁연 대기자

괘서(掛書)는 남을 모함하거나 나라를 비방하는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거나 투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괘서 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행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무고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따라서 조선조정은 괘서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괘서사건이 전국적으로 42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 특히 많이 일났다. 순조가 11살 나이에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후 성장한 순조가 직접 정치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장인 김조순(金祖순·1765∼1832)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절대 부패해졌고,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하면서 유랑민이 되는 등 국가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후기 훈장들은 가난한 층에 속했다

전회에 청주읍성 북문에 괘서를 붙인 김치규(金致奎)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본래 청주사람은 아니었다. 김치규는 평안도 중화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충청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고장 청안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청안 토호였던 이원기(李元基)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훈장 노릇을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이같이 몰락한 지식인은 19세기에 전국적으로 많이 양산됐고 이런 층을 '빈한사족'(貧寒士族), 즉 가난하고 추운 양반층이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과외선생을 한 셈이나 이것으로는 호구지책이 해결돼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훈장들은 이런 모습을 설경(舌耕)이라고 자조했다. '혀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김치규는 이런 스트레스가 국가와 사회적 불만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누적돼 청주읍성 북문에 정부 전복을 선동하는 괘서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1862년의 청주목은 매우 어수선한 한 해였다. 3월 김치규에 이어 그해 10월에는 박형서(朴亨瑞) 괘서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괘서를 붙인 것이 아니라 괘서를 투척했다. 순조실록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청주목의 괘서 죄인 박형서(朴亨瑞)를 국문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진영 아사(衙舍)에 밤에 흉서를 투척한 변고가 있었는데 절도사 안광질(安光質)이 밀봉하여 치계하니, 도로 하송(下送)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또 흉서를 진영 아헌(衙軒)에 투척하였는데, 김치규(金致奎)와 이창곤(李昌坤)을 전습하여, 말한 것이 몹시 흉패(凶悖)하였다."-<순조실록>

인용문은 박형서가 며칠을 사이에 두고 괘서를 두 군데나 살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김치규' 이름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봐, 이와 연관되는 내용을 담을 것을 알 수 있다.

1862년의 연이은 괘서사건으로 김치규는 처형됐고, 연좌제에 의해 딸 아지(阿只)는 경상도 영일현의 관노가 됐다. 그리고 훈장노릇을 하게 했던 이원기는 귀양을 가야 했고 청안현은 전국 여러 縣중 순위가 가장 아래인 현이 돼 사실상 읍호가 강등됐다.

그리고 박형서 사건후의 청주목은 결국 읍호가 강등돼 서원현이 됐고, '충청도'는 그 이름에서 청주가 빠지면서 '공충도'가 됐다. 강등된 읍호는 대개 10년 정도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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