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속출했던 충청인 한양도성 쌓기

2013.06.20 17:10:03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 형식이 다른 본보의 기사를 통해 조선 세종 때 한양도성을 수축할 당시 충청도 사람도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됐고, 이때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 가량 현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전국적으로는 32만2천400여명이 동원됐다. 조선시대 인구를 감안하면 이같은 규모는 전국 모든 장정들이 총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경상도에서 가장 많이 동원됐고 충청도는 그 다음인 17%를 차지했다.

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 성돌에 지명을 새긴 것은 사후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더러 등장한다.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하였다.'-<세종실록>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농번기가 끝난 겨울철에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토목공사를 주도한 인물은 세종이 아닌 상왕 태종이었다.

지명 영동이 새겨진 성돌

'도성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성을 쌓는 군사가 도망하는 자는, 처음 범하면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두 번 범하면 참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그리고 수축 책임자에게 술을 내린 것도 역시 태종이었다.

'태상왕이 도성 수축 도감에게 술을 내렸다. 도성 수축 도감에게 계하기를, "무릇 서울과 지방에 행문이첩(行文移牒)하는 일은, 만약 지체하는 사람이 있으면, 2품 이상의 관원에 대해서는 위에 아뢰어 논죄하고….'-<세종실록>

인용문 중 '행문이첩'이라는 표현은 문서발송 업무를 말한다. 태종은 공사 시기가 한겨울인 점을 감안, '만약 지체하는 사람이 있으면'라는 표현에서 보듯 공기를 단축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날짜보다 늦게 한성에 도착한 고을이 생겨났다.

'창녕현감 김사제와 영산현감 김대현을 의금부에 가두었으니, 도성 수축하는 군사를 뽑아 보낸 것이 시기에 닿지 못한 까닭이었다.'-<세종실록>

그러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의외로 난공사였다. 무거운 돌을 다루는 공사 때문인지 사망자가 속출했다. 길지 않은 공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8백명을 넘었다.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각도의 군인 중 죽은 사람이 모두 8백 72명 입니다" 하니, 그들이 사는 고을에 명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부물(賻物)을 주게 하였다.'-<세종실록>

예나 지금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인정(人情)까지 기대하는 것은 과분한 바람일 수 있다. 당시 공조 참판(종2품) 이천의 말이 상당히 매몰차다

'공조 참판 이천이 대답하기를, "수십 명의 제조 중에서 오히려 박춘귀(朴春貴)같이 병들어 죽은 사람도 있는데, 하물며 30여 만의 군인 중에서 5, 6백 명이 죽는 것이 무엇이 괴이합니까"라고 하였다.'-<세종실록>

그러자 세종은 이천이 어전 앞에서 물러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천의 말은 전혀 옳지 못하다. 군인의 죽은 것이 어찌 박춘귀의 병들어 죽은 것과 같으냐."-<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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