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가 날마다 연이어졌다, 옥천 적등원

2013.07.18 17:11:41

조혁연 대기자

전회 언급한 옥천 이원면 적등진(赤登津)은 교통량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경상도 김천과 지레 사람들이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적등강 수변에 위치한 나루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적등진'으로, 그 루트는 영동-옥천-보은-청주가 됐다. 적등진은 이 루트 중 영동-옥천 사이에 위치했고 그 옆에는 적등원과 적등루도 존재했다.

적등진 주변은 지금도 풍광이 매우 빼어난 편이다. 이 때문인지 뭇 문객들이 적등루(赤登樓)를 찾아 시를 많이 읊었다.

고려말 사대부 출신인 조준(趙浚·1346∼1405)은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다. 특히 그는 경제이론에 밝아 당시 세법의 근간이 되는 과전법을 입안했다. 그도 적등루를 올랐다.

옥천군 이원면의 적등원지 표시석.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신증동국여지승람>

서두에 언급한 것과 달리 적등루가 한가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직(李稷·1362~1431)이 지은 시에는 적등루 일대가 대단히 혼잡하게 그려져 있다.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 있구나.'-<신증동국여지승람>

서거정도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의 왕래하는 말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연이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라는 기록을 남겼다. 역시 조선전기에는 교통량이 대단히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신이라는 표현은 적등원 길목이 일본 사신이 왕래하던 곳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있다. 윤두서와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그는 서애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을 수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적등루를 소재로 빼어난 한시를 남겼다.

'강가의 적등루는 옛날부터 들었는데 / 오늘 말을 세워보니 옛 언덕만 남았구나 / 운물은 천고의 세월 따라가지 않거늘 / 문장은 도리어 육정이 데리고 갔구나 / 위태로운 시기에 병갑은 힘을 쓰기 어려웠으니 / 사업이 끝난 뒤 영웅이 어찌 스스로 도모하랴 / 해 저무는 모래강변에 우두커니 서서 / 바람 맞으며 묵묵히 다시 머리만 긁적이네.'-<오음유고 제 2권>

인용문에 '옛 언덕만 남았구나'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로 미뤄 적등루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누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 보수작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거정이 지은 사가문집(1488)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

'정통 기사년(1449, 세종31)에 화성(和城) 최후(崔侯)가 수령으로 부임해 왔다. (…) 하루는 수령이 들에 나갔다가 적등 원루(院樓)가 잔폐한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있으면서 어찌 그냥 방치해서, 길 가는 사람들이 쉴 곳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신증동국여지승람>

현재 적등강, 적등원, 적등루 등은 모두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다만 '적등원지' 표시석이 설치돼 있어, 과거의 흔적을 알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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