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임금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다

2013.08.20 16:48:32

조혁연 대기자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 한질은 광혜원에서 세종대왕을 영접한 것으로 보인다. 1872년 군현지도로 '만승, 광혜원'의 지명이 보인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세종실록 26년 2월 30일자>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와 '지금 이후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今後愼勿如此)는 세종의 말은 민본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가행렬에서는 고려 문화가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건국 초기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청주에 이르니 목사 진여의와 판관 민도생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 앞에 절하였다.'-<태조실록 2년 2월 5일자>

나례는 가면과 붉은 옷을 입고 귀신쫓던 고려시대 벽사의식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 중 과격성과 과시성을 겸비한 인물은 아무래도 조카의 보위를 찬탈한 세조일 것이다. 그의 이런 면은 초수리 거둥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세조는 죽산을 거쳐 진천에 들어온 후 신라 김유신 장군의 태가 묻혀있는 진천 길상산에 올라 사냥놀이를 즐겼다. 이때 적지 않은 군사들이 산짐승 몰이꾼으로 동원됐다.

'임금이 지응사 김국광(金國光)에게 이르기를, "충청도 군사는 2만여 인이나, 보병을 다 계산하면 4만여 인에 이를 것이니, 명일 길상산에서 몰이하게 하라" 하고…'-<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세조의 어가 군대에는 군기가 엄하게 적용됐다. 횃불의 밝기가 일정치 않자 곧바로 벌이 내려질 정도였다.

'5고(鼓)에 어가가 거둥하였는데, 어가 앞의 횃불이 혹은 꺼졌다가 혹은 밝아졌다가 하였으므로 횃불을 없애도록 명령하고, 즉시 경력 고태정과 진천현감 남척을 가두었다.'-<세조실록 10년 2월 21일자>

반면 세조 자신은 '장전'으로 불리는 이동천막 안으로 대신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세조실록 10년 2월 20일 기사>

세종의 '지금 이후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와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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