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초정원 옆에 초수"

2013.08.27 15:22:02

조혁연 대기자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물론 전래담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주왕이'는 원탕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임금이 움직이는 것은 '왕림'이 아닌 '거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세종실록에는 당시 행궁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일부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이 초정리와 목천 초수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세종실록 26년 5월 2일자>

인용문 증 '동학'은 크고 넓은 골짜기, '환위'는 둘러싸서 경비하는 것, '초소'는 나무와 풀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으나 지금의 원탕 주변이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초정원 옆에 초수가 있다'고 기록했다.

'초정원'(椒井院)과 '초정'이 갖고 있는 입지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6세기 전기)은 초정원에 대해 '초수 옆에 있다'고 적었다.

실학 백과사전류의 하나로 분류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19세기)는 보다 자세히 표현했다.

'우리 세종, 세조께서 이곳에 거둥해 목욕을 했다. 초정원이 있는데 초수 옆에 있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我世宗 世祖幸行此地浴 有椒井院 在椒水旁 今有遺址)-<오주연문장전산고 천지편 지리류 수토속변증설>

이규경은 같은 책에서 비슷한 내용을 또 다시 기술했다.

'우리 세종, 세조 양조가 일찌기 이곳에 거둥했다. 초정원이 초수 옆에 있었다고 전해진다.'(世宗 世祖兩朝 嘗幸于此 椒井院 在椒水旁云-<〃천정 상당초정변증설>

조선시대 교통시설인 '원'(院)은 도로변에 위치했다. 세 사료는 공통적으로 세종대왕 행궁이 초정원 옆에 존재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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