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실장, 초수리서 급사하다

2013.09.03 15:36:31

조혁연 대기자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文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文을 숭상하고 武를 하대하는 이른바 숭문언무(崇文偃武)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 강참찬은 귀주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쟁을 지휘했다. 이는 나중에 무신란의 주요 원인이 됐다.

반면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 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다. 무과 장원 제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해 놨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세종실록 26년 4월 10일자>

성달생의 묘는 파주 법원읍에 위치한다.

인용문의 '어구마'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성달생은 그 어구마를 무과 수석의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후 주로 궁궐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간혹 '경호실수'도 저질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부왕(태종)의 면전에서 검을 휴대했다가 세종의 격노를 샀다.

'총제 성달생, 이순몽, 홍섭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었다. 임금이 상왕을 따라 모화루에서 사신을 전별할 때, 성달생, 이순몽, 홍섭 등이 별운검 총제로서 임금을 따라 모화루 위에 올라 칼을 차고 시립(侍立)한 것을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부왕(父王)이 여기 계옵신데 어찌 칼을 차고 옆에 있을 수 있느냐" 하고, 급히 재촉하여 누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환궁하여 곧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게 하고(…).'-<세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자>

임금의 거둥 때 어가 주위에서 왕을 뒤따라가는 것을 '수가'(隨駕)라고 한다. 이때의 '隨'는 '따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수가는 계속 걸어야 하기 때문에 고령의 신하가 수행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었다. 임금의 어가를 수가하다 급사하는 사고가 청주목 초수리(초정)에서 일어났다.

1444년은 세종대왕이 초정약수에 거둥했던 해다. 바로 무과 장원 1호인 성달생이 이때 급사했다. 그의 나이 69세로, 요즘으로 치면 '업무상 사망'에 해당된다.

'1444년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충청도 초수리에 행행한 세종을 수가하였다가 갑자기 죽었다.'-<세종실록 26년 4월 10일자>

시체를 염할 때는 저승길 양식으로 쌀을 넣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반함(飯含)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달생의 입에는 세종의 명에 의해 쌀이 아닌, 보패(寶貝)가 넣어졌다.

'이미 소렴(小殮)을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반함을 하였느냐" 하매, 유사가 창졸간에 빠뜨렸다. 임금이 꾸짖고 내탕고의 보패를 내어서 물리게 하고(…).'-<세종실록 〃>

사육신 성삼문의 할아버지가 성달생이다. 성삼문이 현달할 수 있었던 데는 할아버지 성달생의 '업무상 죽음'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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