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이규경, 초정약수를 찾다

2013.09.05 15:39:40

조혁연 대기자

조선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있다. 그는 조선 제 2대 임금인 정종의 직계손이나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는 집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오는 학문인 '가학'(家學)이 발달했다. 이런 가풍은 그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63)에게로도 이어졌다.

그 역시 '한미한 양반가=가학'의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주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부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국내는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태어난 것이 조선후기 최대 백과사전의 하나로 불리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제목중 '오주'(五洲)는 '5대양 6대주' 할 때의 그런 오주로, 그의 관심이 국내는 물론 세계로 뻗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0권 60책의 방대한 이 백과사전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됐다. 다행히 그 전에 필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오주연문장선산고'는 현재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이규경은 이 백과사전에서 청주목 초수리(초정)를 방문하는 과정과 그 당시 느낀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놨다. 이 책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초정약수를 다룬 부분은 아직 번역돼 있지 않다.

필자가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초정약수를 다룬 대목인 '上黨椒井辨證說'(천지편 중 泉井)을 번역했다. 그가 이 기록을 작성한 시점은 '純廟甲午 10월 16일'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는 순조재위 4년째가 되는 해로, 서기로 치면 1804년에 해당한다.

그는 초정으로 향하기 직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予聞之久矣。欲一見之。歲純廟甲午十月旣望。自嶠南歸省中州。時慈위(門+韋)留於第三弟寓舍。在於忠州牧治之連原驛島村。'-<상당초정변증설 중에서>

그리 길지 않지만 신경이 쓰이는 문장이다. 인용문 중 '旣望'은 보름(望)이 막 지난 16일, '嶠南'은 嶠(조령)의 남쪽인 영남, '慈위'는 어머니의 높임말이다.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것(초정약수 지칭)을 오래 전에 듣고서 그것을 한번 보고자 했다. 그래서 순조갑년 10월 16일에 영남으로부터 충주로 돌아왔다. 이때 어머니는 충주목 연원역 도촌의 셋째동생 집에 머물고 있었다.'

사료를 보면 이규경의 외가는 충주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는 충주서 멀지 않은 지금의 제천 덕산면에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그해 이규경은 충주를 출발해 청주를 거쳐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초정약수를 방문했다. 뒷 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路經上黨。於途次遇一旅問椒井。則其人手指一村曰。此椒井村也。'-<〃>

번역하면 '상당(청주 지칭)을 경유한 길에서 한 무리를 만나 초정을 물은 즉 한 사람이 손으로 한 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초정촌이다."'-<〃>

이 부분은 잘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충주에서 초정을 가려면 청주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시는 달랐다. 충주-음성-괴산-청안-청주를 거친 다음 초정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이 조선시대 '공로'(公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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