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 "너희는 그 영천을 마시겠구나"

2013.10.10 16:21:46

조혁연 대기자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당하자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로 몽진을 갔다가 귀로에 청주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가 공민왕 재위 11년인 1361년이다.

임금이 궁궐 안에 있으면 먼지를 뒤집어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피난을 위해 궁궐을 나서면 먼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바로 '몽진'(蒙塵)은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그 자체로 난세를 의미하고 있다.

공민왕은 임시수도인 청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실시, 그 합격자 명단을 취경루(지금의 망선루)에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의 청주 무심천 변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라는 큰 누각에 올라 호종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이날 시짓기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26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종 때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당시 공북루에는 총 28편의 시편액이 걸려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날 공북루에서 지은 26편의 시 외에 1편은 그전부터 걸려 있었고, 또 다른 1편은 개성에서 보내온 백문보(白文寶?·∼1374)시였다. 즉 '26+1+1'인 셈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방문중, 신숙주, 박팽년, 류의손, 이개, 최항, 황수신, 안평대군 등 당시 세종대왕을 호종했던 신하와 대군들은 초정약수를 소재로 한 시를 개인문집 등에 남겼다.

하연의 영정.

그러나 그해 세종대왕을 따라오지 못하고 조정에 남아 있던 대신들 중 일부도 초정약수를 소재로 한 시를 지어, 초수리로 내려보냈다. 그 시에서는 부러움이 잔뜩 묻어나고 있다. 상황상 조정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좌찬성 하연(河演·1376∼1453)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좌찬성은 3정승(의정부)을 보좌하던 벼슬이나 그 지위가 종1품에 해당할 정도로 고위직이다. 이때 지어진 7언시 2절의 시가 '原韻詩'(원음시)라는 제목으로 그의 문집인 경재집(敬齋集)에 실여 있다.

'경사스러운 여러 복이 하늘에서 마땅히 온 조짐은(諸福嘉祥應自天) / 역사에 전해오는 말에서 진실로 증명되었도다(史中傳語固懸懸) / 예로부터 조선의 서원이라는 땅에서(朝鮮上古西原地) / 오늘 분명히 좋은 샘을 발견하였다(今日分明見醴泉)'-<경재집>

이어지는 내용의 끝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초수리까지 함께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과 탄식이 배여있다.

'연화(煙花)에 3월 봄이 되었는데 동남쪽 하늘(煙花三月艶陽天) / 빈 성에 주막을 알리는 깃발만 달려있는 것을 보았노라(惟見空城酒O懸) / 임금님을 수행한 그 영광을 부러워하였는데(扈從龍光堪企羨) / 들으니 자네들도 그 영험한 샘물을 마시겠구나.(更聞諸子飮靈泉)'-<〃>

'연화'는 아지랑이 오르고 꽃이 피는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말이다. 전회에 신숙주도 '숙소로 돌아와 식사하고 나서 때때로 머리 돌려 먼 곳 바라보니 / 복숭아꽃 오얏꽃 핀 건너 마을 깨끗하기도 하네'(보한재집)라고 1444년 초정약수 주변의 봄풍경을 읊은 바 있다.

하연은 한 때 조선시대 토지세법의 근간이 되는,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의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곧 다루겠지만 두 법이 실험되어진 땅은 초정약수 옆의 우리고장 '청안현'이었다. 초정약수에서 고개 하나 쯤을 넘으면 청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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