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초수리 민가수는 38호였다

2013.10.31 17:42:12

조혁연 대기자

세종대왕 대의 과학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장영실과 이천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김조(金金+兆·?∼1455)라는 인물도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김조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연려실기술 제 3권>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수리(초장약수)에 거둥할 때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김조이다. 그의 보고를 통해 당시 충청도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은 기근으로 나물만 먹는 자도 있고, 혹은 먹지 못해서 부황이 난 자도 있으며, 쌓아 둔 곡식도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하고, 적은 자는 1, 2되 밖에 없는데, 혹 떨어진 자 중에는 경작하던 토지에 파종도 하지 못한 자가 3분의 1분은 된다 하니….'-<세종실록 26년 4월 27일자>

사진설명: 세종실록은 당시 초정약수 농가호수가 38호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식량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기껏해야 1~2말, 적은 사람은 1~2되라고 세종께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초수리에 거둥하던 때의 가뭄은 전년도부터 계속 된 것이라는데 더 심각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청주목 백성들이 나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 집집마다 벼 2섬을 무상으로 주도록 했다.

'병조에 전지하기를, "지난해에 농사가 부실하여 백성의 양식이 넉넉하지 못한데, 또 올 봄의 거둥에 모든 지대(支待)와 영선 등의 일을 갑자기 준비 판납하느라고 소요됨을 면하지 못하여 백성의 살길이 염려되니, 본주(本州·청주목 지칭) 인민에게 호마다 벼 2섬씩을 주라" 하였다.'-<세종실록 26년 3월 21일자>

세종대왕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곳의 초수리 일대 주민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하게 생각했다. 특히 초수리 일대는 세종의 어가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전답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세종은 이들 농가에 대해서는 쌀과 콩으로 보상을 했다.

'병조에 전지하기를, "초수리 근지(近地)에 사는 백성들의 토지는 밟아 뭉겨 지름길을 이루었기 때문에 종자를 뿌릴 수 없게 되고 진황지가 되어 버렸으니 논 한짐(一負)마다 쌀 5두를 주고, 밭 한 짐마다 콩 5두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세종실록 26년 5월 1일자>

뿐만 아니라 세종은 행궁 가까운 곳의 농민에게는 술과 고기 등 음식도 하사했다. 자신의 경호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상황을 배려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수리 근방 농민 38호(戶)에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다.'-<세종실록 26년 3월 24일자>

문장의 원문은 '賜椒水里旁近農民三十八戶酒肉'으로 매우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1444년 3월, 즉 세종대왕이 초정약수를 방문했을 때의 초수리 호수가 38호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세종실록지리는 '초자(椒子·초정 지칭)의 속성이 2이니 김(金)·한(韓)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필(畢)이다'라고 적었다. 초수리 38호 중에 김과 한씨 성을 가진 양반이 거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성은 과거 기록에 없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를 편찬할 당시에 새로 기록된 성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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