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현을 대상으로 貢法을 실험하다

2013.11.12 16:24:33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단을 내렸다. 세종은 관료는 물론 '여염의 세민(細民)', 즉 평민에까지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5일자>

전국민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는 이런 배경하에 실시됐다. 조선 전기는 당연히 모든 권력이 국왕 1인에게 집중돼 있고 또 신분의 차별이 뚜렷한 봉건시대였다. 그럼에도 세종이 '세민'의 여론까지 들어보려 한 것은 이미 그때 민주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만큼 여론수렴 결과는 다섯 달 후인 그해 8월 초순에 나왔다. 결과는 공법시행 찬성 의견이 대략 57%, 반대가 42%로 찬성자가 많았다.

'호조에서 중외의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49명입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10일자>

당시 여론조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수는 총 17만2천806명이었다. 그러나 정황상 '백성들'이라고 해도 여성과 노비들은 대상에서 제외됐을 것이다. 토지 소유권은 남자에게만 주어져 있었고, 노비는 사람이 아닌 '움직이는 재물'이었다.

충청도 반대자가 1만4천13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여론조사는 도(道)별로 큰 편차를 보였다. 충청도는 전국평균과 달리 공법 반대자가 67%(1만4천13명), 찬성자가 33%(6천982명)으로 반대자가 두배 이상 많았다. 특히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송인산(宋仁山)도 반대했다.

'충청도의 수령 35명과 품관·촌민 6천 982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송인산과 도사 이의흡과 수령 26명과 그밖에 품관·촌민 등 1만 4천 13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나머지 지역은 여론 결과를 살펴보면 충청도와 함께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함길도 등에서 공법 반대의견이 많이 나왔다. 반면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는 찬성률이 무려 99%에 달했다. 다음은 경기도와 경상도의 여론조사 결과이다.

'경기의 수령 29명과 품관·촌민 등 1만 7천 76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5명과 품관·촌민 합계 236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경상도에서는 수령 55명과 품관·촌민 등 3만 6천 262명은 모두 가하가 하고, 수령 16명과 품관·촌민 37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이처럼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지역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게 표출된 것은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비옥한 지역의 백성은 조세부담이 줄어든다고 여겼다. 반면 평안도, 함길도 등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세종대왕은 찬성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공법 시행의 명분을 확보했다. 세종은 곧바로 이를 전담할 기구인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또 특정 지역을 골라 이른바 세율(稅率) 적용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 특정지역은 바로 초정약수 고개 너머의 청안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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