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주와 회인의 인구 차이

2013.12.05 16:19:13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수령들이 임지에 나가서 힘써야 할것으로 7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로, 여기에는 '호구증(戶口增)'도 포함돼 있다. 인구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다. 나머지 칠사는 농상(農桑)을 성하게 할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정을 닦을 것, 부역을 균등하게 할 것, 소송을 간명하게 할 것, 서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고칠 것 등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구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아를 언제부터 사람으로 봤느냐는 점이다. 경국대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무릇 구타로 태아가 사망한 것과 수태후 90일 초과한 것으로 형체가 이뤄진 것이면 타태죄(구타에 의한 낙태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수태후 90일 이내로 태아의 형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는 구타상해로 논죄하지 타태죄로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이상에서 보듯 90일 전의 태아는 사람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닌 '잠재적인 인간'으로 인식했다. 전통시대 역대 권력자 중 임산부를 가장 이해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정말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종은 노비가 임신을 했을 경우 노비부부 모두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 26년 4월 26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경외의 여종이 아이를 배어 산삭에 임한 자와 산후 1백 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을 시키지 말라 함을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부터는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라고 적혀 있다. 즉 산모에게는 100일, 그 남편 노비에게는 30일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다만 전국의 모든 노비가 아닌, 관청노비만을 대상으로 했다.

인구와 관련해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의외로 '아내 연상형' 부부가 많았다. 신랑과 신부 가족이 결혼을 앞두고 주고받는 편지를 '혼서'라고 한다.

학자들이 이 혼서를 분석한 결과, 남자의 평균 초혼연령은 16.2세, 여자는 17.3세로 '아내 연상형'이 많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빨리 얻기위한 수단으로 어린 남자를 연상의 여성과 결혼시키는 풍습이 성행했다.

대동여지도의 회인현 모습이다.

이는 왕실도 마찬가지여서 세종과 소헌왕후, 연산군과 장녹수, 성종과 폐비윤씨, 숙종과 장희빈 등은 모두 '아내 연상'이었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충북의 시군별 인구 분포도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지금은 청주가 충북의 수부(首府)이지만 당시는 충주 인구가 훨씬 많았다. 정조 때 편찬한 '호구총수'(1789년)를 보면 당시 10대 도시는 서울, 평양, 의주, 충주, 전주, 경주, 함흥, 상주, 진주, 길주 순으로, 충주가 4위에 올랐다.

이때 충주는 8만7천여명, 청주는 4만여명으로 2배 가량 차이가 났다. 반면 당시 회인현의 인구는 4천400여명으로 충주보다 20배 가량 가장 적었다. 호구총수에는 면별 인구수도 기록돼 있다.

당시 충주 남변면이 6천352명으로 도내 최다였고, 최소는 역시 회인현내 강외면으로 296명이었다. 이밖에 삼수갑산으로 유명한 함경도 삼수 역시 255명을 기록, 인구가 희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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