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부인과 딸은 왜 옥천으로 피신

2014.01.09 14:58:20

조혁연대기자

김옥균의 부인은 기계 유씨(兪氏)로 두 사람이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김옥균이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후 일본으로 망명할 당시 슬하에 7살 난 딸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1870년대 중·후반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전투가 벌어진 창덕궁을 탈출, 인천항에서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부인 기계유씨와 딸도 연좌제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시아버지 김병태(金炳台)가 살고 있는 우리고장 옥천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당시 옥천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김옥균의 정변 동지였던 정납이란 인물이 쓴 '옥주유고'(沃州遺稿)에 등장한다. 옥주를 지금의 옥천을 말한다.

김옥균과 부인 기계유씨의 합장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다.

정납은 이 유고에서 '김옥균의 처 유씨가 옥천 관노로 있을 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쓴 것으로, 바둑연구가 이청 씨가 '김옥균 통신'이라는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유씨가 한때 옥천관노가 됐다는 것은 피신해 왔다가 신분이 탄로난 것을 의미한다.

주한일본공사관은 김옥균 부인의 행방이 묘연하자 정보망을 총력 가동했다. 주한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인 스기무라(杉村濬)는 1894년 6월 8일자 '문서번호 機密 第84號'를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앞으로 송고했다.

그 제목은 '金玉均의 生父 및 妻와 딸에 대한 처리문제'로, 스기무라는 이 정보 보고문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들 모녀는 멀리 충청도 沃川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인 중에도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피살됐을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옥균의 처는 읍리(邑吏) 아무개의 첩비(妾婢)가 되고 그 딸은 도망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등 풍설이 구구각각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1894년 6월 8일자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인용문은 김옥균 처의 생사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에 소문이 매우 무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스기무라는 이어지는 내용을 '그래서 이달 1일 外務督辦과 면회했을 때 김옥균의 처와 딸의 현황을 확인했더니, 督辦(독판·관직명)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특별히 교살됐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니 무사할 것이 틀림없다고 대답했습니다'라고 적었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이 죽은 해는 정확히 10년 차이가 난다. 이 때문인지 김옥균의 처인 기계유씨에 대한 이후의 세간 관심을 점차 시들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스기무라는 정보 보고문의 후미를 이렇게 적었다.

'게다가 오늘날에 와서 어쩐지 김옥균의 처와 딸에 대해 내외국 사람이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아 다시 여기에 대해 마음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근래 남쪽의 소란이 더욱 격렬해져서 이 일에 대해 의논할 여가도 없고 하여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인용문 중 '근래 남쪽의 소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동학 농민군의 저항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894년 상반기가 되면서 동학의 기세가 더욱 불타올랐다. 동학군은 4월 7일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했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고 이어 집강소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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