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는 복조리, 봄에는 도리깨를 만들다

2014.05.01 15:16:27

조혁연 대기자

법주사 사하촌은 분지 지형을 띄나 경작지는 넓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대표적인 부업이 복조리였다.

사하촌 주민들은 9월이 되면 복조리의 주재료가 되는 산죽을 채취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채취된 산죽은 △하루쯤 말리기 △껍질 벗기기 △네 가닥으로 쪼갠 후 물에 담그기 등의 과정을 거쳐 복조리 재료로 사용됐다.

이때 여자와 아이는 바닥조리, 성인 남자는 '우기'와 '매끼틀기'를 주로 맡았다. '우기'는 바닥조리를 오므려서 묶는 것을, 매끼틀기는 복조리의 허리 부분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을 일컫는다. 복조리의 세는 단위는 '지리'로, 50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사하촌 주민들은 이 복조리를 '지리' 단위로 묶어 보은은 물론 청주, 상주장까지 내다팔았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한 부업은 도리깨의 '노리'(아들) 만들기였다. 도리깨는 크게 손잡이 막대, 노리, 꼭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노리'는 보은지방 사투리로 표준어는 '휘추리'다.

복조리 제작이 끝나면 영농철 전까지 사하촌 주민들에게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이때 봄부업으로 도리깨를 많이 만들었다. 주재료는 속리산에 식생하는 물푸레나무가 적격이었다.

물푸레나무는 단단하면서 비교적 곧은 편이었다. 제작 공정은 수증기로 찌기, 곧게 펴기, 잔가지 치기, 붙들어 매기 등으로 대략 하루가 소요됐다. 이때 곧게 펴고 잔가지를 제거하는 것을 '노리를 잡는다'라고 표현했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의 가을부업은 송이 채취였다. 국립민속박물관 구술 자료에 따르면 사하촌 주민들은 송이를 지게로 지고 내려올 정도로 많이 채취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하촌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송이 가치를 잘 몰라 소주 1병값인 20원을 받고 송이를 판 시절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송이를 잘 따는 사람을 '버섯꾼'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송이가 군락을 이룬 '송이밭'을 부자 지간에도 서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고령이 되면 '송이밭'을 아들에게 마치 유언처럼 귀뜸해줬다.

과거 법주사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 모습.

지금의 60대 이상은 속리산으로 신혼과 수학여행을 많이 갔다. 이때 법주사 경내에서 '맹활약'한 직업군이 일명 '찍사'로 불린던 사진사였다. 이들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찰 경내에 많게는 2백명 가까이 존재, 필림 1통에 2만원을 받고 신혼부부와 동행을 하며 촬영했다. 신혼여행 중에는 요즘말로 기분이 업 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을 과도하게 찍었다.

따라서 당시 신혼부부 중에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으면서 비용이 과다하게 발생, 울면서 집으로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법주사의 상징은 미륵대불과 팔상전으로, 높이가 매우 높다.

따라서 두 건조물을 사진 안에 잡아넣으려면 사진사가 뒤로 멀찌감치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 인물이 작게 나오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를 해결해 목돈을 만진 사람이 박경수씨다.

그는 독일제 '린호프' 광각렌즈를 이용, 팔상전과 미륵대불을 배경으로 찍어도 인물이 크게 나오는 사진을 찍어 대히트를 쳤다. 그는 속리산 망개나무 군락지를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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